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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昔氏王族의 600年 秘史"
새삼스레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내용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읽어 보노라면, 너 나 없이, 매우 이상스럽다는 느낌을 가지게 마련인 대목이,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創國記錄(창국기록)부터가 그렇다.
東明王(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나, 溫祚王(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하게 된 사연, 그리고 신라를 세운 朴赫居世(박혁거세)에 관한 설화 등, 그들 세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자세한 기록을 하여 두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보다 2천여 년이 앞섰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통일조선의 創建(창건)에 관해서는, 오직 중국사에서 인용한 記事(기사)가 몇 줄 있을 뿐이니, 이 어찌 怪異(괴이)하다 않겠는가?
그 탓으로, 우리의 건국사는, 애매모호한 소위 단군신화 속에 파묻혀 있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檀紀(단기) 4334년 대신, 우리민족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西紀(서기) 2001년을 맞이하게 돼 버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의 檀君史(단군사)를 소홀히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의 大罪(대죄)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어찌 보면 단군사의 누락보다도 더 엄청난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文武王(문무왕) 2년(서기 662년) 2월조를 보면, '本彼宮(본피궁)의 財貨(재화)-田莊(전장)-奴僕(노복)을 中分(중분)하여, 그 반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줬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본피궁이란,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昔氏王家(석씨왕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석씨왕가의 모든 재화와 노복들마저 모조리 나라가 몰수하여, 그 절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이 느닷없이 삽입된 기사는, 실로 알지 못할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기 662년이라면, 數百年(수백년) 동안 혈투를 계속하여 오던 숙적 백제를,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끝끝내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 경사스러운 때다. 그런 국가적으로 기쁜 때에는 으레,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상식일 텐데, 오히려 전례가 없는, 석씨왕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단행됐다니 어찌된 일인가?
왜 하필, 이 더 없이 기뻐해야 할 때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신라 三王家(삼왕가)의 하나인 昔氏王室(석씨왕실)에 대하여, 문무왕은, 그토록 무자비하고도 가차없는 철퇴를 내렸을까?
문무왕은, 석씨왕실에 대한, 서릿발 같은 날벼락 처단을 집행한 다음 달인 3월이 되어서야, 죄인들에 대한 전국적인 사면을 선포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석씨왕실의 재산을 몰수한 사실만을 기록해 놓았지만, 사실은 이 때, 석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석씨는, 전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도, 8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1985년 통계) 稀姓(희성)으로 전락돼 있다.
신라의 3왕실 가운데서, 김씨와 박씨는, 그 자손이 각각 880만명과 350만명에 가까운 방대한 수를 헤아리는 大姓(대성)으로 자라난 사실에 비춰 볼 때, 석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혹한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한 사람 또는 몇몇을 처형한 것이라면 모르되, 석씨 전체에 대하여, 지금 생각하여도 끔찍하고도 소름이 끼치도록 처참한 처분이 취해졌다면, 거기에 대하여, 그 당시의 온 나라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왜 석씨왕실뿐 아니라, 모든 석씨에 대하여, 그토록 혹독한 처벌을 내렸는가에 관하여, 편찬자는 단 한 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더욱 주목해야 할 일은, 김내물왕(金奈勿王)이 왕위에 오른 서기 356년부터, 고려가 건국된 때까지, 거의 600년 동안의 우리나라 역사에는, 석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문중에서, 侍郞(시랑) 昔載興(석재흥), 兵部令(병부령) 昔時宗(석시종), 左僕射(좌복사) 昔運尼(석운니), 密直司(밀직사) 昔漢一(석한일) 등이 연달아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려조에 들어선 다음, 文宗(문종) 때가 지나서부터이다.
더구나, 석씨족보에는, 昔脫解(석탈해)의 23世孫(세손)이라고 하는 석재흥이, 始祖一世(시조일세)라고 되어 있을 뿐, 석씨왕실의 마지막 임금인 訖解王(흘해왕)의 손자 恬(념)과 姓(성) 이후, 석재흥에 이르는 계보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석씨족보의 공란 뒤에는, 석씨 조상들이, 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겪었으면서도, 문자로는 한 마디도 자손에게 남기지 못한, 기막히도록 서러운 사연이 적혀 있을 것이며, 후세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애절한 호소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가 밝히지 않았던 석씨들이 겪은 참변의 실상을, 일본 古代史(고대사)와 옛 문헌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열쇠로 삼아 파헤쳐 밝혀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600년에 걸친 놀라운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독자는, 이 글을 읽어감에 따라, 오늘날 일본이라고 불리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보면, 바로 우리와 핏줄로 이어져 있는 겨레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두 나라 사람들이, 신라가 건국한 때부터 시작하여,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650여년 동안, 왜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21세기로 발을 내디디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전후 약 6년(서기 1592~1597년) 계속됐던 임진왜란이나, 36년 동안의 일본식민통치를 운운하기보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기막힌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 직시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우리 고대사의 참 모습을 되찾는 슬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 이상 지난 오늘까지도,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 이 구석 저 구석에는, 아직도 서먹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일 정치인들의 안목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나도록, 일본고대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게을리하고 있는 우리 사학자들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두 나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끈질긴 더덕때를 말끔히 씻어 없애는 세척제가 되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여러분 앞에 보내려 한다.
21세기를 맞이한 인류는, 지금 우주식민지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섰다.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고 생각한 ‘아이작 뉴턴’의 "왜?" 하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뉴턴’의 "왜?"는, 대우주의 만유인력법칙을 발견케 하여, 인류의 꿈을 무한한 우주공간 속으로 뻗어 나가게 했다.
그리고 이 글에 담겨져 있는 숱한 "왜?"는, 망각의 時海(시해) 속에 파묻혀졌던,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되찾게 해 줄 것이다.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故 박 병 식
자료제공 한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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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 물품비만 있으면 창업 가능”
최근 창업시장에서 열정과 전문성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소자본 창업이 가능하게 하는 기업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창업이라는 도전을 감행하곤 하는데 이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이 체인본사의 건전성과 투자에 대한 수익성 그리고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꾸준한 지속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기자가 찾은 업체는 이러한 사안을 모두 만족하고 있으며, 소자본 창업이라는 또 다른 매력과 체인본사에서 요구하는 보증금과 시설비가 없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주)신일식품(대표 김연암)은 여주(암팔라야, 주 서식지 필리핀, 일본명칭: 고야)라는 열매를 주 재료로 당뇨와 다이어트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당하차를 개발하여 체인점 방식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업체이다.
여주(암팔라야)는 의약품이 아닌 천연식품으로 과거부터 원기회복과 질병치료를 위한 민간요법의 재료로 활용되어 왔으며, 특히 펩타이드성 물질인 카라틴과 식물인슐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당뇨병에 좋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한 번의 복용으로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복용이 이어져야 하는 자연식품으로 지방분해를 촉진시키며, 레몬이나 딸기에 비하여 비타민C가 4배가량 많이 함유되어 있고 가열을 하더라도 성분의 변화가 미미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 유기농재배로 생산한 국내산 재료를 티백형식으로 만들어 보리차처럼 끓여 먹을 수 있는 당하차로 출시하여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창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주)신일식품은 창업에 있어서도 초도 물품비만 있으면 창업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창업조건의 거품을 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주)신일식품 김연암 대표는 “앞으로 여주를 이용해 다이어트제, 숙취해소제, 항암효과제를 개발 출원예정이며, 추가로 여주음료를 출시할 예정에 있다”며 “여주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건강식품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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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역사만 신화인가?”
기원전 3000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이집트 파라오의 하루는 목욕재개부터 시작하여, 국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숫 하마 잡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고(왕 제도 이미 존재) 또한 그때의 “풍요와 즐거움의 극치” 가 파피루스에 기록 되어 있다.
기원전 2700년경 에는 제2왕조 때인데 이때부터 태양신 “라“(Ra :라 =나)를 처음 숭배하기 시작 하였고 새로운 건축기술이 발달하여 당시 행정담당 서기들의 글과 그림이 파피루스에 남아 있다.
기원전 2500년 쿠푸왕 때는 20년이 걸려 2.5톤짜리 돌 230만개로 대 피라밋이 완성 되었는데, BC 5세기의 그리스 기록에는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라고 기록 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의 역사는 그리스인들이 많이 왜곡 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들은 서양 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또 나일강을 이용하여 돌을 옮기며 시나이반도에서 아스완과 더 밑으로 누비아까지 땅을 개척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각품 중에 유리로 만든 “눈“과 미 이 라 의 부패방지를 위한 특별 처리까지 하였다.
BC1279~BC1212 파라오 “세띠”의 아들 람세스 대왕 때는 쌍으로 쏠 수 있는 활이 개발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돌을 쪼개고 다듬는 기술이 개발되어 실용화 된 것이 이미 1000년 이 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한편 아시아의 우리민족 시조 중 한사람인 치우천황은 기원전2700년 경 에 이미 청동기로 무기와 갑옷과 농기구를 만들고 사용 하였지만(동두철액: 머리는 동이며 갑옷은 쇠) 신화로만 기록되어 알려지고 있다.
은나라 때의 “기자가 조 선 으로 갔다” 는 그 조선이 어느 지역이며, 태양족인 우리민족이 살았던 곳 마다 “광명 의 땅 (아사달)”으로 이름 지어, 조선. 부여. 가라(야). 한. 북경. 조양. 평양. 왜. 일본...등으로 기록된 우리 고어가 한자(漢字)로만 표시된 것을 언어학으로 연구 하지도 않는다.
치우천황 보다 약400년 후의 인물인 “단군”(기원전 2333년)도 신화로 만들고, 마치 곰과 호랑이가 변해서 사람이 된 것처럼, 유전학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은 억지 표현을 하였고, 비유법 을 직설법으로 의도적인 해석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무리하고 고의적인 왜곡된 해석인가.
또한 기원전 551년의 공자와 기원전 372년의 맹자는 대나무에 “옻“으로 글을 써서 기록(과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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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명인 구영국교수의 전통문화산책(8)
오랜만에 대지위로 단비가 내렸다. 이제 곧 봄이 오고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로움이 인간생활에 축복과 풍요로움과 위대함과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봄이 달려오면 당장 맨발로 뛰어나가서 제일먼저 누구를 맞이할까? 생각만 해도 사뭇 즐거운 일인게다.
아침 이슬을 먹고 사는 달팽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반딧불이가 나들이를 간 후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아대는 소리에 노루가 잔뜩 긴장을 하고, 멧돼지가 꼬리를 흔들며 촉각을 세워 경계를 하고, 팔색조가 후박나무위에서 멀리 먹이를 향해 집중하고, 산양이 계곡 바위에서 동료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로 선 보초를 선다. 자연의 이치는 우리가 사는 만큼이나 지구를 순환적으로 자연현상을 보호 하고 있다.
자연의 위대함은 얼마나 무한적인가. 산과 바다, 태양과 대지, 바람과 구름, 인간과 동물 등 어느 하나 지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잡힐 듯 말 듯 한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떨어져 지하수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된다. 빗물이 모이고 모여서 큰 바다가 되니까 바다란 결국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 이다. 그러니 결코 크다 하여 자랑하지 말고 작다하여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크고 작은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한 속 이다.
앞으로 우리 인간들은 해저도시를 건설하고 우주를 개발하여 우주공간에 집을 짓고 사는 날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와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
우주의 평균온도는 섭씨 영하 270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비해 지구중심부의 온도는 약 5,000도를 넘지 않고, 우주의 나이는 약 150억 살 이지만 지구는 약 46억 살 이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 하는 반면 은하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은하는 빛(세상에서 가장 빠른 물체)의 빠르기로 움직이는데 은하가 있는 곳이 바로 우주의 끝인 셈 이란 것도 알아야 한다.
이 은하엔 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하고 각각의 은하에는 또 천억 개나 되는 별들이 있다고 하니 이 은하계 일원의 하나인 지구에 살고 있는 위대하다는 한 인간도 대우주 앞에선 전혀 조금도 위대 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공을 쌓듯 마음을 내려놓고 늘 겸허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여름밤 옥상에서 반짝이던 별들은 저마다의 색깔이 각기 다 틀렸는데 그것은 별의 온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별에도 일정한 수명이 있는데 수십억 년이 지나면 빛을 잃고 사라진다. ‘신성’은 바로 이러한 별의 현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 전통의 중요한 품위 부분을 애기하고자 한다. 그럼 전통의 품의라는 측면으로 접근해보면 고유의 황칠달항아리는 그 대상으로 적격이다. 설명되는 이유는 이렇다.
황칠달항아리는 햇볕이나 백열전구 밑에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밤에 수려하고 은은한 달빛아래에서 감상해야 황칠달항아리의 최고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또 달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황칠의 금색과 절묘히 조화되면 한없이 상상할 수 없는 흡인되고야마는 바로미터 감흥에 젖는다. 따라서 이것은 여기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감수성과 기술성과 예술성을 접하게 됨과 동시에 전통문화의 보존이 이토록 절실하게 해야만 하는 까닭에 연유하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바람이 부는 어떤 달밤에 지인과 소박한 약주 잔에 달을 담아 마신 적이 있다. 잔속에 들어 있는 달에는 자꾸 보면 볼수록 또렸한 나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언제나 부정할 수 없는 백제황칠장인의 모습이었던 것을 후에 세월과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혀 지지 않는 장인의 제 모습은 선조와의 교감의 모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항상 부족한 제 자신을 생각하며.
필자는 ‘달맞이하러 가자’ 는 말을 참 좋아한다. 왜냐면 달에는 토끼의 꿈과 희망이 있어서이고 견우와 직녀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제일 으뜸의 생각은 북두칠성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 우리민족의 지주 정신이 되는 ‘아리랑’이 있어서이다
달에는 정성을 들여 희망이 잇고 달빛에는 감흥이 있어 황칠달항아리가 살아 있다. 달맞이하러 가는 것은 한 속인 황칠달항아리를 보러 가는 것이다.
이태리의 가죽장인은 한사람이 하루에 혼자 한 개의 가죽핸드백을 만든다. 전부 모든 공정을 혼자 다 해서 완성 한다. 이른 바 명품핸드백이다. 꼼꼼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존경해야할 장인정신이다.
우리나라에도 이태리 장인이 부럽지 않은 훌륭한 장인이 각 분야에 많다. 다만 아쉬움이 있어 말하자면 명품을 만드는 국제적인 이름의 전통장인이 많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드는 천하의 명품은 우주의 별빛처럼 이와 같이 세상에 더욱 빛난다.
-필리핀 국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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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다리’라는 용어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동을 위한 수단’과 ‘강과 하천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목적물’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강에 놓여진 수 많은 다리들도 이러한 맥락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강에는 언제부터 다리가 존재했으며, 다리의 설치로 인한 이해득실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왕이 선왕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거나 온천을 가는 등 나들이를 할 때 큰 배 수십척을 동원해 엮어 그 위에 널빤지를 설치하여 기마 5-6필이 자유롭게 가로로 서서 건널 수 있는 부잔교를 세우곤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부잔교는 일시적인 다리에 불과하고 설치시에도 민간의 배를 동원해 설치에 한달, 해체에 한달이 걸리는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부작용이 많았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다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효과는 어떻게 표출되고 있을까?
서울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의 확대와 교통량의 증가, 물동량의 확대로 인하여 다리의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나루가 번창하던 것이, 1897년 경인철도부설공사와 1899년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한강철교의 착공을 시작으로 현대식 다리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에서만 30개에 육박하는 다리가 세워졌고 한강 지류까지 따지면 수백개에 달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는 길이 26마일의 경인철도를 개통하며 설치 되었으며, 1900년에 정식 개통을 맞이하였다. 또한 경부선 복선화 계획에 의하여 1912년 제2철교가 준공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토목기술이 발달되어 개통된 다리가 아니라 외세가 침탈의 목적으로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이권쟁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술국치 6년 뒤인 1916년 최초의 인도교가 건설되었으며, 중앙차도가 4.5미터, 좌우보도 각 1.6미터로 기공 되었으며, 교통량 해소를 위한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 되었는데 폭 20미터에 길이는 10,005미터였다.
이렇게 설치된 한강의 다리들은 6.25를 맞으며 수난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서 수많은 사상자와 물량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1958년 재 가설로 다리의 기능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강의 다리는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돼 1970년 5월 16일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구양화대교, 제2한강교 등 순차적인 준공을 보이며 한강 이남과 이북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도 한강을 잇는 다리들은 하루에 수백만의 자동차와 사람, 전철이 이동하는 중요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묵묵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있다.
다음호에는 한강의 다리에 대해 조금더 깊게 살펴보겠다.
류덕선 전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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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경교장 3월부터 공사 들어가
서울시가 1945년 해방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각료들의 숙소로 사용된 종로구 새문안길에 위치한 경교장(京橋莊)을 내년 8월 15일 광복절까지 완벽 복원한다.
경교장은 1945년 11월 중국으로부터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청사로 사용하던 곳으로, 김구 주석 서거 이후 미군주둔지, 주한 대만대사관저 등으로 사용되다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매입해 병원 건물로 사용해왔다. 이 과정에서 내외부가 크게 변형돼 복원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서울시는 지난 2010년부터 추진해온 경교장 복원이 오는 3월부터 원형 훼손된 벽체 철거를 시작으로 본격화 된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경교장 복원을 위해 그동안 강북삼성병원의 협조로 경교장 내 모든 병원시설을 이전 완료(2010. 6. 30)하고,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복원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복원 설계 및 문화재청 현상변경 허가(2010.10.13)를 완료했다.
특히 서울시는 경교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 귀국 당시의 모습으로 진정성 있게 복원하고,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경교장에서의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의 활동상, 경교장의 역사 등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번 경교장 복원은 상해(1993)-중경(2001)-항주(2007) 등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청사 복원에 이은 마지막 복원으로 일련의 임시정부 청사 복원에 방점을 찍게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항일 독립운동을 총 지휘했던 사령부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현재 중국 내에는 임시정부 관련 사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던 상해-항주-중경 청사가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중국 정부와 우리나라 독립기념관, 그리고 삼성 등 여러 기업의 후원으로 이미 복원됐다.
서울시는 복원 추진과정에서 경교장 전체의 원래 모습을 관련 사료 및 지적도, 관련 사진, 증언, 백범기념관 등의 고증을 거쳐 역사상 최초로 규명했다.
그동안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 1938년 발행)’ 등을 통해 경교장 내부는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경교장의 전체 규모나 원형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었다.
서울시의 조사 결과,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건물과 주차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공간에 넓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한옥도 1채 있었으며, 경교장 남쪽에 정문(주출입문)이, 동쪽으로 부출입문이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경교장 동쪽에는 연못·다리·차고 등 부대시설이 있었고, 경교장의 전체 면적이 5,267.44㎡(1,593.40평)나 되었던 것도 밝혀졌다.
서울시는 이러한 경교장의 원 모습을 누구나 알기 쉽게 모형으로 제작해 원래 모습과 복원될 경교장의 미래상이 궁금한 시민들에게 3월 1일부터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 2층 전시실에 모형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서울시는 경교장의 복원공사 현장을 광복절인 8월 15일과 임시정부 환국일인 11월 23일에는 국민들이 복원 진행과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현장을 공개할 계획이다.
현장 공개는 전문가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강북삼성병원에서 임시정부 청사로 원형 회복 중인 경교장을 직접 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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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2
유구한 한강의 물줄기를 전편에서 기술했듯이 한강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포용하고 있다. 이번 편에서는 선사시대의 한강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한강변을 따라 발달된 비옥한 옥토와 한강이 제공하는 수산물들로 인하여 선사시대에도 이미 한강을 기준으로 많은 문명들이 존재하였으며, 채집과 수렵이 동시에 발달되는 모습을 유적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면목동 구석기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유적이다. 아울러 한탄강의 전곡리 유적과 금강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대비되는 후기 구석기유적으로 서울 지역의 구석기 문화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 구석기인들의 일시적인 생활거주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은 면목지구 택지 건립을 위한 공사장 에서 1967년 황용훈을 비롯한 경희대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석기들이 약 30평 정도의 면적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로 인하여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발굴된 석기는 대부분 몸돌석기로 외날찍개·양날찍개·찌르개·긁개·망치돌 등이 있고, 격지석기로 찌르개 옆날긁개·끝날긁개 등이 있다.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을 살펴보면 토기와 석기 및 골각기 등이 발견되었으며, 구릉이나 야산에서 집중적인 채집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원초적인 어로기법인 낚시어법이나 자돌어법이 성행하여 창 또는 작살을 이용한 어로행위가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개인적인 단독기법으로 수확량의 한계가 있으며 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어망을 이용한 채집활동인데 여러 유적에서 근거가 되는 어망추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망을 이용한 어로행위는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행위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선사시대에도 이미 공동체적 활동과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공동체적 활동과 생활은 결국 대량생산을 통한 잉여생산물 축적과 환경에의 적응으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문화가 형성, 발전되며 결국 고대국가로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한강유적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왕성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청동기문화를 거쳐 한강유역에 고대국가가 설립되는 밑걸음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호에는 청동기와 철기유적을 살펴보겠다.
류덕선 전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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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물줄기가 있다. 북으로는 금강산 부근에서 출발하고 남에서는 강원도 삼척시 대덕산에서 출발한 물줄기는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합쳐져 하나의 물줄기로 서울을 관통하여 황해에 이르는 대 장정을 형성하는 물줄기를 우리는 한강이라 부르고 있다.
한강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문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라고 불렸으며, 고구려에서는 큰 강이라는 뜻의 “아리수”, 백제에서는 “욱리하”, 신라에서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고 불렸으며, 삼국사기에는 “한산하” 또는 “북독”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도 했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으로 명칭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강”이라는 표현도 했지만, 한강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백제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국식 표기로 “한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굳어져 “한강”으로 정착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강”은 말 그대로 큰 물줄기, 다시 말해 큰 가람이라는 우리의 고어가 점차 변형되며 “한강”으로 정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한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직 없는 상황으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한강”은 수많은 지류들이 합쳐지는데 그 길이가 간선유로연장 481.7㎞, 법정하천연장 405.5km, 유역면적 2만 6018㎢(북한지역 포함 3만 4473㎢)이고 상류부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려 있으며, 남한강을 한강의 본류로 구분하고 있다.
남한강은 평창강과 달천, 섬강에 이어 청미천을 합류하며, 양화천과 복하천, 흑천을 어우른 후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북한강은 금강천과 금성천 등을 합치면서 흐르다가 서천, 수입천과 화천군의 지류들을 어우르며 춘천에서 소양강과 만나게 되고 다시 가평천과 홍천강과 합류한 뒤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어우러진다.
양수리에서 하나가 된 한강은 경안천과 합류한 후 팔당호에 머물다가 서울로 진입하면서 중랑천, 안양천을 어우른 후 김포와 고양의 경계선을 만들고 파주의 곡릉천과 만난 뒤 임진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접어들게 된다.
이처럼 장대한 여정을 거치는 한강은 주변에 비옥한 침식분지를 형성하게 되었고 곡창지대를 형성하며 흐름으로 인하여 과거 선사시대부터 문화발달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삼국시대 이래 쟁패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도읍지가 한양에 자리하면서 더욱 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강은 비단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만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강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주거지의 식수원을 공급하는 역할도 하고 있으며, 현재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상수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천연의 방어막을 제공하고 있어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며,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국가가 번영을 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류덕선 전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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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대 공용장비센터, “기업 신제품개발 해결사 등극”
동명대학교가 녹산공단에 설치한 공용장비센터를 통해 기업체들의 저비용 신제품 개발에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동명대학교 공용장비센터(이하 센터)는 지난 18개월 동안 145개사를 대상으로 모두 442건의 애로 기술 해결 등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1년 반 동안에 이들 기업에 총 30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제공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니콘미싱공업 나명선 관리이사는 “공용장비센터와 협력해 인건비 및 개발예산 1억2천만원 가량을 절감했습니다. 출시를 앞둔 해당 신제품의 매출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라며 신개념 산학협력에 힘입어 신제품(출시를 앞둔 신제품이라 제품명을 밝히지 않음)의 연구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유니콘미싱공업는 지난 3월 센터의 ‘기술교류회’를 통해 ‘기업맞춤형 기술 및 제품 개발 지원’소식을 접하고, 신제품개발 전체를 턴키로 주문키로 결정한 뒤 회사측 개발팀과 센터 직원들로 TFT를 구성해 10여 차례 기술검토회를 가지며 여러 난관을 극복한 끝에 계획보다 ‘3개월 가량 일찍’ 설계 및 시제품을 생산했고 그 품질까지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명선 이사는 “과거‘브라더미싱’본산지로서 회사 명예를 걸고 개발하는 이번 제품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며 “동명대가 실질적으로 우리 회사의 연구소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고 밝히고 “향후 개발예정인 최첨단 공업용 미싱 개발도 동명대에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완성도 높은 제품 개발과 신뢰성 기술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주창하고 있는 센터(센터장 윤대중 교수)는 신뢰성 기술 등을 기업에 지원하는 기술 전문 지원기관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센터는 지난 18개월 동안 145업체에 모두 442건의 기술을 지원해, 해당 기업들은 개발시간(장비가동시간) 23,920h을 단축했고, ▲설계비 절약 16억여원, ▲설계시간 절약 7억여원 ▲개발전체 등 모두 31억1천만원의 예산절감을 해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2010년 3월에는 중기청이 지원하는 ‘연구장비공동이용사업’의 주관기관에 선정되면서 기업체로부터의 신뢰를 더욱 축적하여 본 사업 시작 2개월만에 7개 업체 참여에 24건의 대형 수주를 올리기도 했다.
기존 교육기관의 아마추어식 기술이 아니라, 산업체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프로 지향적 기술 지원’을 모토로 센터구성원 모두를 관련전문가로 구성하여 산업체 요구기술에 즉각 대응토록 했기에 가능한 성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공용장비센터의 ‘정밀측정기술교육장’은 신뢰성기술 분야 대명사격인 정밀측정기사 국가검정자격증 취득을 위한 특강을 연 2회 실시하여 특강참여 응시자의 90%가 정밀측정기사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추풍령 이남의 유일한 정밀측정기술교육기관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동명대 산학협력단의 신동석 산학협력중심대학사업단 단장은 “초정밀분야 신뢰성기술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높아가고 있다”면서 “수많은 동남권지역 공단입주업체 편익을 위하여 동명대는 부산지역대학 최초로 신뢰성기술전문기관으로 도약을 위한 국내외적으로 권위있는 KOLAS(KOrea Laboratory Accreditation Scheme) 인증을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