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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03-04 16: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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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라는 용어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동을 위한 수단’과 ‘강과 하천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목적물’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강에 놓여진 수 많은 다리들도 이러한 맥락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강에는 언제부터 다리가 존재했으며, 다리의 설치로 인한 이해득실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왕이 선왕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거나 온천을 가는 등 나들이를 할 때 큰 배 수십척을 동원해 엮어 그 위에 널빤지를 설치하여 기마 5-6필이 자유롭게 가로로 서서 건널 수 있는 부잔교를 세우곤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부잔교는 일시적인 다리에 불과하고 설치시에도 민간의 배를 동원해 설치에 한달, 해체에 한달이 걸리는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부작용이 많았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다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효과는 어떻게 표출되고 있을까?

서울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의 확대와 교통량의 증가, 물동량의 확대로 인하여 다리의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나루가 번창하던 것이, 1897년 경인철도부설공사와 1899년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한강철교의 착공을 시작으로 현대식 다리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에서만 30개에 육박하는 다리가 세워졌고 한강 지류까지 따지면 수백개에 달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는 길이 26마일의 경인철도를 개통하며 설치 되었으며, 1900년에 정식 개통을 맞이하였다. 또한 경부선 복선화 계획에 의하여 1912년 제2철교가 준공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토목기술이 발달되어 개통된 다리가 아니라 외세가 침탈의 목적으로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이권쟁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술국치 6년 뒤인 1916년 최초의 인도교가 건설되었으며, 중앙차도가 4.5미터, 좌우보도 각 1.6미터로 기공 되었으며, 교통량 해소를 위한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 되었는데 폭 20미터에 길이는 10,005미터였다.

이렇게 설치된 한강의 다리들은 6.25를 맞으며 수난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서 수많은 사상자와 물량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1958년 재 가설로 다리의 기능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강의 다리는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돼 1970년 5월 16일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구양화대교, 제2한강교 등 순차적인 준공을 보이며 한강 이남과 이북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도 한강을 잇는 다리들은 하루에 수백만의 자동차와 사람, 전철이 이동하는 중요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묵묵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있다.

다음호에는 한강의 다리에 대해 조금더 깊게 살펴보겠다.

류덕선 전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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