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준 기자]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일어난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확산 기미를 보였다.
시위가 규모가 커지면서 경찰서와 도청을 공격하고 마산과 창원으로 시위는 확산되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박정희 정부는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가 출동해 시위대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이후 열흘 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는다. 훗날 김재규는 재판에서 대통령을 살해한 이유로 부마 항쟁에서 나타난 광범위한 민심이반을 이유라고 밝힌 바 있다.
유신체제의 몰락을 재촉했던 위수령이 제도가 생긴지 68년 만인 11일 공식 폐기됐다.
정부는 이날 오전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위수령 폐지령안을 의결하면서, 위수령은 국회의 별도 의결 없이 국무회의에서 의결 후 바로 폐기됐다.
1950년 3월 27일 제정된 위수령은 치안 유지에 군 병력을 동원하는 계엄령과 비슷하지만,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계엄령과 다르다. 또 우리 헌정사에서 1979~1980년을 제외하고는 선포 사례가 거의 없는 계엄과 달리 위수령은 몇 차례 발동된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10월 대통령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위수령이 발동했고,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도 박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 마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앞서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 직후에도 서울 일대 병력이 출동한 적이 있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위수령 발동이 검토됐던 사실이 나타난다. 당시 군 출동 준비령이 하달됐음이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87-4호’ 문건에 위하면, 특전사령관의 반대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결국 위수령은 발동되지 않았고,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위수령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군 병력을 동원,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법령이라는 점에서 군사독재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위수사령관은 재해 또는 비상사태 때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병력 출동 요청을 받을 경우 육군 참모총장에게 출동을 상신할 수 있다. 그러나 군에 법 집행권을 부여하면서도 상위법에 구체적 근거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