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아는 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 이치를 아는 자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정직한 자에게 권력을 맡겨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야 /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은 빼앗지 말라고....”
영국의 민담에 전해 내려오는 로빈 훗. 난세에 세상을 구하는 의적이다. 이미 소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 수많은 변주로 익숙한 그를 이번엔 뮤지컬로 만난다.
2005년 독일에서 초연된 뮤지컬 ‘로빈 훗’은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목숨마저 위태로웠던 필립 왕세자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내용으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으로 돌풍을 일으킨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음악감독 콤비가 다시 한 번 힘을 합했다.
왕의 친위대였던 로빈 록슬리는 친구 길버트의 배신으로 인해 리차드 왕을 암살했다는 누명을 쓴다. 가족과 지위, 사랑했던 여인마저 뺏긴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도적질하던 셔우드 숲의 무리를 만나 ‘로빈훗’이란 이름을 받고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 싸우게 된다. 왕의 동생 존은 왕이 되기 위해 적통 왕세자인 필립을 죽이려하지만 로빈 훗 무리에 의해 저지당한다. 필립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작품에 부제를 단다면 ‘필립 왕세자 진짜 왕 만들기’쯤 되겠다. 세상물정 모르고 철부지였던 필립은 거칠고 힘겨운 숲에서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이 왜 왕이 되어야하는지, 어떤 왕이 될 것인지 고민하고 깨달아간다. 로빈 훗의 절대적인 도움을 힘입어.
이 오래되고 진부한 이야기는 여전히 현대에도 숙제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12세기 잉글랜드와 2015년의 대한민국. ‘갑질’에 대해 사회적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분개하고 힘든 현실을 견디는 것뿐일까.
로빈 훗이 말한다. 사람으로 살기 위한 희망을 놓지 말자고. 대항할 무기는 마음에 새겨진 단단한 기개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하나만은 잃지 말자고.
셔우드 숲은 꽤나 그럴싸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진짜 나무가 서있는 깊은 숲 속 같은 느낌이 좋다. 1막이 즐겁고 유쾌한 반면 2막은 상당히 아쉽다. 주요 인물들의 갈라쇼를 보는 느낌마저 든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흐르지 못하는 까닭이다. 존 왕을 연기한 베테랑 배우 서영주는 코믹한 연기로도 완전히 무대를 지배했는데 능청스러운 연기와 안정적인 넘버소화로 산만한 중에도 돋보였다.
길버트는 왜 왕과 로빈을 배신하는 건지, 로빈의 연인이었다가 길버트와 결혼한 마리안의 생각은 대체 뭔지,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너무 가볍다보니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부족해 산만하고 급작스럽게 끝나버려 아쉽다. 그래도 좋은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대중성은 잃지 않아 가벼운 웃음코드와 시원한 넘버들을 즐길 수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의적의 우두머리가 된 로빈훗 역에 유준상, 엄기준과 이건명, 철부지 왕세자에서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필립 왕세자에 규현, 양요섭과 박성환, 왕이 되고자 몸부림쳤던 존 왕자 역은 서영주, 필립왕세자를 충성스레 보좌하는 그레고리 역에 홍경수, 배신자 길버트 역에 조순창과 박진우, 마리안 역에 서지영과 김아선, 셔우드 숲의 여전사 조이 역에 김여진과 다나, 이 밖에 김민수, 황이건, 김 선, 김정은, 노해영, 박무진, 문성우, 김기영, 장고운 등, 한류스타들과 베테랑 배우들의 호연이 즐겁다. 오는 3월 29일까지 디큐브 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