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건물을 짓다 만 듯, 철골로 만든 대도구가 놓여있다. 그 뒤로 촛불처럼 흔들리는 그림자가 비춰진다. 스산한 탄식 같은 허밍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연극 ‘햄릿, 여자의 아들’이 시작됐다. 그림자와 배우들의 몸이 아름답게 움직인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불안한 듯.
송현옥 연출의 ‘햄릿, 여자의 아들’은 여성적인 세계관을 중심으로 ‘햄릿’을 재해석하고 있다. 무용을 결합한 송 연출의 연극은 배우들의 선이 매우 아름답다는 인상과 함께 다가왔다. 처음, 어머니의 재혼소식에 “약한 자(frailty)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한탄과 분노를 발산하는 햄릿. 그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가?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삼촌 클로디어스과 어머니 거트루트의 급작스런 결혼에 당황하고 분노한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클로디어스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느끼는 햄릿. 그는 도시를 지나가는 카니발행렬의 연극단원들을 만나 직접 여장을 하고 왕과 왕비 앞에서 연극을 한다. 국왕살해를 주제로 한 연극에 클로디어스는 본심을 드러낸다.
원래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게 아니고 13세기 초, 전해 내려오는 덴마크의 전설을 토마스 키드가 ‘원햄릿’으로 각색해 편찬한 것을 토대로 그 당시 유행하던 복수 비극의 형태로 셰익스피어가 새롭게 재창조 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고 또 수많은 작품가운데 최고의 비극이라고도 칭해지는데, 옳은 길을 가고자했으나 결국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피를 피로써 갚는” 복수에 대한 강렬한 대사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덴마크라는 나라에 흐르는 정서였다. 그 나라에 흐르는 민족성 같은 것으로 피는 피로써 갚아주어야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실을 풀어야했다. 그래서 햄릿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신의 괴로움과 방황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 수많은 오해와 갈등, 실수, 그리고 절망.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알았던 현명한 햄릿은 인생의 풍파 가운데 쓰러지고 휘둘린다. 그래서 나온 명언, “to be(존재)와 not to be (비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에 이른다. 그의 사고는 매우 이분법적으로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무엇이 사랑이고 증오인지, 무엇이 삶이고 죽음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오필리어의 죽음과 어머니의 변함없는 사랑가운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아들을 사랑하지만, 남편 클로디어스 또한 사랑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지만 여성인 거트루트의 욕망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자신이 오필리어를 사랑했지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던 것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여성적인 세계관을 가장 선명히 볼 수 있는 장면은 독배를 마시는 거트루트의 모습에서이다. 그녀는 햄릿에게 건네주려는 잔을 대신 받으려한다. 그러나 클로디어스는 잔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 때에 알았을 텐데. 충분히. 빼앗다시피 손에 쥔 잔을 거침없이 입으로 가져가는 거트루트.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만, 아들을 사랑하고 다만, 그를 포기할 수 없었을 뿐인데.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파국을 치달았다. 결국 모두를 감싸 안아야하는 몫 또한 그녀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4년이 셰익스피어의 탄생 450주기를 기념하는 해인만큼 그의 수많은 명작들이 재해석되고 있다. 극단 물결의 연극 ‘햄릿, 어머니의 아들’은 현대적인 감각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대사를 통한 사실주의적인 연극이 아닌,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움직임, 다채로운 영상까지 더해졌다. 공연 예술계의 새로운 시도를 위해 모인 창작 집단으로 무용과 연기가 정교하게 결합된 반추상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새로운 연극 스타일을 시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서울 무용제 대상’, ‘2006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한 황미숙 안무가가 어머니이고 여자인 거트루트를, 극단 물결의 단원인 무용가 오주원이 오필리어를 연기한다. 클로디어스 역에 김준삼, 고뇌하는 햄릿 역에 나현민, 폴로니어스 역에 이영진, 로젠크란츠 역에 박경호, 길든스턴 역에 박상현, 코러스장 외 넝마지기 역에 김충근, 멋진 오브제를 보여주는 코러스에 성혜라, 권설아, 장해라, 박진영, 최민석, 이현우, 진여준, 황태규, 정소정, 도상란이 출연한다. 오는 6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