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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 하남정보산업고등학교와 교육협약(MOU)체결
중국 칭화대학 한국캠퍼스가 하남정보산업고등학교와 방과 후 중국어 교육과 활용, 교육용 언어 콘텐츠 개발 연구 및 취업 등을 위한 상호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번 MOU는 중국어 언어 교육, 교육용 콘텐츠 개발, 학생의 국내·외 취업 협력 등 다양한 영역을 갖춘 칭화대 한국 캠퍼스와 인재 양성을 위한 기술 정보 및 장소를 제공하는 하남정보산업고와의 공동 협력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남정보산업고등학교 박명윤 교장은 “학교에서 배우는 IT와 디자인이, 중국을 통해 발돋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하남정보산업고등학교와 칭화대 한국 캠퍼스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기술 역군으로서의 미래를 꾸려갔으면 한다”고 전했다.
칭화대 한국 캠퍼스는 중국어 교육과 관련,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형식의 다자간 학습 콘텐츠로 언어 교육의 효율을 극대화할 방침이다. 특히 방과 후와 방학기간을 이용한 집중교육과 어학연수로 IT와 디자인능력을 기본소양으로 갖춘 인재들의 중국어교육까지 책임지겠다는 계획이다.
하남정보산업고등학교는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에 있는 공립고등학교로서 1995년 3월 개교 이래 전자상거래과, 디지털콘텐츠과, 광보홍보디자인과를 운영하면서 5,92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전문 교육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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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문화창조 역사(3)
지난호에 이어...
그 후 이들 대표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인들이 묻어주고 제사 지내는 풍속은 존경의 표현으로“고인돌”을 만들었든 것이 후세에까지 알려지고 있다.(영국의 “스톤핸지”도 고인돌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는 외국학자들이 많다.)전 세계 약 70% 이상의 고인돌이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삼성, 산동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보통 기원전 8000년과4000년 사이가 많다.
“말 과 문자“의 시작이 여기 이듯이 인류 문명의 시작도 이곳이 아닐까?
유럽에서는 청동기시대를 기원전3000년을 기준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민족의 역사시작 시점이 얼마나 앞서고 훌륭했든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광복 전 조선시대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 중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민족을 세뇌 시켰던 말 중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조센 진 은 명태처럼 패야 맛이 난다”, “엽전처럼 앞뒤가 다른 놈”, “아침저녁으로 생각이 다른 놈”,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반도인” 등....
이 같은 말들은 본래 우리들의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우리는 친구가 월 셋방으로 이사를 해도 집들이를 하였고, 사촌이 출세하면 마치 자기가 잘된 것처럼 느끼며 집안(가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당파가 많았던 조선조 때에는 서로 조심하여 청백리가 가장 많았으며, 삼족을 멸하느니 구족을 멸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귀양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귀양 가서 동의보감(허준), 추사체(김정희), 자산어보(정약전)등 공직생활 중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귀중한 일들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많은 사화가 있었지만 정작 직접 처형당해 죽은 사람은 모두 28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는 홍익 인간정신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 이기도하다.
모함을 받은 주인집 자식을 자기 자식과 바꿔서 등에 업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살다 죽기 전에 실토하며 양 아들의 성씨를 밝혔던 사실 등은(사륙신의 한사람 박팽년 아들), 주인과 하인 관계 이상의 가족 같은 신뢰와 사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일제강점기 35년을 견디며 민족정신 이 파괴되고, 서로의 신뢰가 무너지는 불신과 살아남기 위해 남을 헐뜯는 비굴한 나쁜 습관만 남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6.25 동난 까지 겹치게 되니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려 알몸이 된 우리민족의 수난은 단군 이래 최악의 비참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지혜의 민족으로서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앞선 유럽의 몇 백 년 발전을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안에 따라잡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다이나믹하고 신바람의 민족, 아세아의 종갓집답게, 우리의 드높은 긍지, 거대한 저력으로, 다함께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이끌어 나가며, 힘차게 한민족의 웅지를 펼쳐나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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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氏王族의 600年 秘史”
지난호에 이어...
김춘추와 담소하며 상대해 준 사람들, 과연 그들은 누구였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부드럽게 말문을 열자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누구였을까?
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김춘추가 동반하고 간, 다까무꾸노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가 신라에 온 것은 서기 646년 9월이다. 김춘추 일행이 왜국으로 간 것은 서기 647년 12월. 그러니까 적어도 15개월 동안, 김춘추와 사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다까무꾸노는 당나라 태종마저 매혹시킨 김춘추의 인품에 흠뻑 심취되어 갔으리라.
한편 김춘추는, 그로부터 왜국 조정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요새도, 각 나라가 외국에 보내는 특사는, 그 나라의 元首(원수)가 절대적인 신뢰를 하는, 유능한 인물이다. 하물며, 왕정시대의 왜국으로부터, 신라로 특파된 ‘다까무꾸노’가 아닌가? 그는 학식이 매우 높아, 國博士(국박사)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며, 당나라에도 여러 차례 파견됐던 인재라고 “일본서기”는 전하고 있다.
신라로부터 귀국한 그는, 동반하여 온 김춘추를 고도꾸 천황에게 謁見(알현)시켰다. 그 공식 회견 자리에는, 여러 大臣(대신)들만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儀禮(의례)가 끝나고, 국빈을 대접하는 宴席(연석)이 벌어졌을 때는, 신라의 왕족을 만나 보려고 모인, 왜국 황족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고도꾸 천황의 누나이며, 그보다 먼저 황위에 있었던 皇極天皇(고교꾸천황)도 있었을 것이다.
후일, 고도꾸천황이 죽은 후, 그녀가 다시 등극하여, 齊明天皇(제명천황)이라고 일컫게 된다. 당나라에서 백제를 치기 위한 대군이 몰려 왔을 때, 천황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녀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다까무꾸노’의 來羅(내라)와, 그녀의 再執權(재집권)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여러 증거가 있다.
“일본서기”에, “김춘추가 담소하기를 좋아했다”라고 특기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김춘추가 왜국에 체재하는 동안, 준수한 인품과 탁월한 사교술을 겸비한 그를 둘러싸고, 황족들과 重臣(중신)들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고 했을 것이다.
다양했을 그들의 화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공석에서의 화제와 사석에서의 화제는 그 내용이나 범주가 매우 달랐을 게 아닌가?
김춘추가 그 어려운 왜국방문 동안에 이룩한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김춘추가 다녀간 2년 후, 그러니까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직후인 서기 649년 12월, 沙?(사찬)의 官位(관위)에 있는 金多遂(김다수)라는 사람이, 10명의 才伎(재기;광대)를 포함한, 37명이나 되는 從者(종자)를 거느리고 왜국을 방문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사찬은, 신라 17官位(관위) 가운데 8위인 직위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외교교섭이라는 것은, 하위사람들끼리 먼저 만나서 기초를 닦은 다음, 단계적으로 고위급 회담으로 발전돼 나가는 것이 순서다.
大阿?(대아찬)인 김춘추는 그보다 3급 위인 5위였다. 김다수보다 훨씬 상위인 김춘추의 외교가 실패였다면, 그보다 하위급인 김다수를 다시 파견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뻔하다.
다시 말하자면, 김다수의 방일은, 김춘추와 왜국 황실 사이에 某種(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후속 실무협의를 위한 행차였던 것임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김다수가 거느리고 간 37명의 종자 가운데에, 10명이나 되는 광대가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도, 그들이 예사로운 외교사절단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준다.
① 왜 김춘추는 이 시기에 왜로 갔을까?
② 왜 倭(왜)는 신라를 건국 초부터 신라만을 공격했을까?
③ 왜 김내물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신라에 대한 왜의 공격이 격화됐을까?
④ 왜 김다수는 37명이나 되는 종자를 데리고 왜로 갔을까?
이 숱한 “왜?”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자면, 모든 의문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왜의 정체를 밝힘으로서만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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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명인 구영국교수의 전통문화산책(11)
6백 년 동안의 전통, 60일에 한번 씩 그러니까 1년에 여섯 번에 걸쳐 밤새도록 술에 취하고 여흥을 즐기며 신나게 놀았던 날, 한 나라의 임금에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밤잠을 안자고 밤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잔치를 벌여왔던 밤샘연회인 역사 속 백야의 잔치가 있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경신수야(庚申守夜)이다. ‘고려사’엔 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1265년 고려24대 원종 6년) 나온다. 궁중에서 열리는 경신대회가 그것이었는데 훗날 고려 25대왕으로 등극하는 충렬왕이 연회의 주최를 주도했던 태자 심(諶) 이었다 한다. 그리고 자주 환락에 빠졌던 충렬왕은 몽고에 충성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라의 재정이 바닥이 날 정도로 사냥과 놀이와 연회를 좋아했던 왕으로도 유명하다. 국가의 재정이 거덜 날 정도의 사치라니 지금 같은 세상의 국가 경영이었다면 왕이라도 당장 쫓겨나 버리고 말 일이다. 도교적 전통에서 시작된 이 밤새기는 인간의 몸에서 아무 형체도 없는 삼시충(三尸蟲)이라는 벌레가 사람이 잠들면 슬그머니 나와서, 옥황상제에게 사람의 죄지은 것을 일러바친다고 믿었다. 지금의 과학적인 생각으로 접근하여 보면 전혀 말이 될 수 없었던 이야기 이지만 당시 도교적 사상에선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두려움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도교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120년 산다고 보았고 또 그 수명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옥황상제가 사람마다 이 삼시충을 다 심어놔서 감시하고 통제하며 60일에 한번씩 이 삼시충 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생명기간을 자르는 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따라서 120년을 살 수 있는 인간수명이 죄를 지으므로 해서 적게는 3일, 많게는 300일의 수명이 무섭게도 많이 단축된다고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애기지만 그때 그 시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더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과거에나 지금에도 끝이 없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 옛날로 치면 얼마나 더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변하지 않고 절실 했겠는가. 생명의 욕심은 끝없다. 궁의 임금도 만백성들도 60갑자로 세어서 그 날이 경신일에 해당하는데, 이 60일은 옥황상제가 사람 전부 삼시충을 심어 놓고, 60일에 한 번 벌의 유무를 판단하여 벌이 있는 자에게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생명의 벌을 주었기 때문에, 이 벌을 피하기 위하여 아예 자신의 몸에 숨어 지내면서 벌의 있고 없음을, 고자질하는 삼시충이 몸 밖으로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잠자는 틈을 타고 삼시충이 나온다고 믿어 날을 하얗게 새면서 잠을 전혀 자지 않았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다.이것은 고려로 시작하여 조선 성종 때 까지 무려 600년 정도의 밤새기 전통이다. 도교적 전통으로 시작되었던 이 전통을 지금의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아주 오랜 전통 중에 200년 전 까지만 해도 매 년 계속 왕과 신하, 온 백성이 지속적으로 해마다 잊지 않으며 해왔던 우리의 풍속이자 전통 이었다. 우리들은 지나온 역사의 많은 것들을 너무나 빨리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상이나 이념, 집착이나 해체는 우리의 사고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의 풍속과 전통은 그냥 이 시대에 이해가 안 되는 세월을 맞이하더라도 편하고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가끔은 따지지 않고 받아 주는 것도 좋을 듯싶다. 더러는 바보스러움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인간이 너무 똑똑하면 피곤하고 사람이 너무 진지하면 재미가 없다. 산꽃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틔우기 위해 추운 겨울과 긴 시간을 제 스스로 참는다.이제 꽃을 봄에 보이고 봄이 웃는데 하지에 시원한 잎을 드리워 주기 위한 연유로 이 순간 이름 모를 나무 가지는 바람을 몰고 와서, 또 다른 튼튼한 생명으로 가을을 다듬고 있다. 사람들이 알아야 시대차이로 작금의 또 다른 우리가 역사 안에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전통의 고마움처럼, 우리의 역사와 문화도 세월에 좋게 썩어서 문명에 거름이 되는 나무이어야 한다. 계승하는 문화의 밑거름으로 싱싱한 전통이 나무의 물이 되어 필요하다. 밤을 새운다는 것은 작업을 하는 소설 작가나 전통장인들에겐 자주 있는 일이지만 아무런 의미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허망한 세월로 시간을 떠나보내며 후회로 숨죽이는 일은 이제는 하지 말아야겠다. 실로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조선조 성종이후의 날밤세기 전통은 없어 졌지만 왜 그런가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최소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것이 그 시대의 시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실로 실존하지 않은 신화나 설화를 대한다고 해서 부정 할 수많은 없다. 실제 있었으나 기록이 없어 나중에 신화로 남거나 우화로 남을 수 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해도 볼 수 없고 역사가 흘러와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해야 할까. 사람의 마음을 만질 수 없고 조상의 혼을 만질 수 없다.-필리핀 국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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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문화창조 역사(2)
지난호에 이어...
중국학자(서량지 교수)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중국역사 이전의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족 뿐이며 이러한 기록들은 중국의 제일 오래된 풍속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과 명나라 사람 오명제의 “조선세기”와 청나라 때 7만9천여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주변국에서 우리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으며, 우리 기록들이 불에 타고 도난당하여 부족한 사료들을, 그들이 증명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도리어 고마울 따름이다. 또 중국의 삼국시대(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 때 기록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부여(동이. 동호) 에 관계된 기록들을 확인하면 부여의 국력이 나타난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사람들은 흰옷, 밝은 옷, 을 즐겨 입고(목화. 무명. 실크) 외출할 때는 금, 은 보화로 치장을 하며 신은 가죽으로 만들어 신고 10월이 되면 일주일을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음곡 을 즐기고 국중 대회를 하는데 이것을 영 고 라고 하더라”. 이때부터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하였으며 주변 나라들의 부러움에 찬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또한 한나라(한고조 유방)가 중원을 통일하고 난 후에도 매년 흉노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심지어는 공주 까지도 조공 하였다.
중원의 패자인 “한“나라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까? 상상해 보시라 !그러한 막강흉노까지도 “부여”에게 조공 하였는데, 흉노 왕이 가장 아꼈던 천리마와 왕비(알씨)까지 바쳤다고 기록 되어있다.(사기 권 백십 흉노전)이러한 부여도 단군조선으로부터 생겨난 나라이니 단군조선이 얼마나 강력하였을까? 여기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가 “치우천왕”보다 약400년 후의 일인데, 중국의 상고시대 나라인 “하. 은(상). 주” 까지도 단군조선에서 국가 성립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은나라의 마지막왕인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서 정치를 타락하게 하여 그 국민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주” 나라를 세운 무왕을 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해주었으니 이 모두가 단군조선 때의 일이었다.
기원전 1766~1123년경의 “은” 나라에는 단군의 영향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누가 잘하느냐가 기준이 되었는데, 단군조선의 제후국 중에 “고죽국” 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고죽국은 동이족들의 나라이기도 하였는데, 아버지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셋째아들인 “숙제”를 보고 임금을 하라고 하였다.
숙제가 생각할 때 큰형인 “백이”가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한데 왜 아버지가 나를 임금을 하라고 하셨을까?
형인 “백이”에게 왕을 양보하니 형 또한 동생 “숙제”에게 “아버지께서 너를 임금 하라고 하였으니 동생이 임금이 되어야한다”면서 서로 양보하다가 “부끄럽다”고 하며 둘 다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백이숙제) 그래서 산에서 나물을 캐먹으며 살다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후세인들의 입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이렇게 “왕”도 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는 우리민족의 근본 마음인 것이다.
그 후 중국의 많은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말하길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조선(동이)에 가서 배워오고 , 조선(동이)의 세제는 1/20(5%) 세제라서 백성들이 전혀 세금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살고, 임금이나 백성이 서로 한 몸의 손발처럼 아끼고 위하며 정치를 하였기에 그때의 정치를 이웃나라에서도 “진성인의 정치” 라고 하였다.(사기 진 본기. 맹자.....)이렇듯 단군(계급의 명칭)은 왕 이라는 명예를 떠나 백성과 한 몸 한 뜻이 되어 생활하였으며 유럽이나 이집트의 왕이나 진시황처럼 백성을 노동으로 괴롭히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모든 건물들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짓고 살았기에 지금도 특별한 건물들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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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氏王族의 600年 秘史”倭(왜)로 간 金春秋(김춘추)<1>
신라 제29대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의 이름은 金春秋(김춘추)다.
그러나 신라사에 있어서의 그의 이름은, 즉위한 다음의 치적보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아, 풍전등화 같았던 신라의 社稷(사직)을 온존케 한, 그의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빛난다.
그가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그의 준수한 용모와 뛰어난 언변은, 당나라 太宗(태종)을 심취시켰다. 그의 품격에 매혹된 태종은, 신라를 괴롭히는 고구려에 출병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13만의 대군을 바다 건너로 보내어, 백제를 응징했다.
그 덕분에 신라는 오랜 숙적인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마저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사실은 새삼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신라가 累卵(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轉機(전기)는, “삼국사기”가 밝히지 않는 김춘추의 訪日外交(방일외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김춘추가 왜국에 다녀온 사실조차 전하지 않는 “삼국사기”다. 그러니, 김춘추가 왜 왜국에 갔었는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다.
다행히 그가 찾아 갔던 왜국에는, 비록 짤막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남아 있다.
“孝德天皇(고도꾸천황)의 大化(대화) 3년 12월(서기 647년), 신라의 大阿?(대아찬) 김춘추가, 전해 9월에 신라로 보냈던 高向黑麻呂(다까무꾸노구로마로)들을 동반하고 와서, 孔雀(공작)과 鸚鵡(앵무)새 각각 한 쌍을 바치므로, 그를 인질로 잡았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담소하기를 좋아했다”
김춘추는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킨 서기 642년, 백제에 보복하기 위한 지원을 얻고자, 고구려로 간 적이 있다. 그 때, 고구려왕은 도움을 청하러 온 김춘추를, 60일이 넘도록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되자, 김유신 장군이 1만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구출에 나섰다. 김유신이 한강을 넘어 달려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고구려왕이, 그를 풀어 주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때는 구사일생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가 김춘추를 잡아 둔 것은, 신라가 몇 년 전에 竹嶺(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을 탈취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국과 신라의 관계는, 고구려와의 그것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왕이 즉위한 직후부터 왜국이 침범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라를 공격한 왜국은, 백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그들은 신라만을 그다지 괴롭혔을까?”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왜국은, 김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그들의 공격을 격화시키고, 서기 393년에는 王城(왕성)을 5일 동안 포위한 일조차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 시기의 절박했던 신라의 사정이 전혀 적혀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그 무렵의 한반도 정세와 격전상황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集安(집안)에서 好太王碑(호태왕비)가 발견된 다음부터다.
“辛卯年(서기 391년) 이래, 倭寇(왜구)가 바다를 건너 와… 신라를 격파했다”
이런 문구가 들어 있는 그 비문에는, 호태왕이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왜군을 격퇴한 사실이 적혀 있다.
實聖王(실성왕) 때가 되자, 견디다 못한 신라는 내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을 왜국으로 볼모로 보내어, 한동안 그들의 예봉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모가 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미사흔을 구하기 위하여, 왕손인 박제상이 왜로 갔다. 그는 미사흔을 빼어 내기는 했으나, 자신은 잡혀서 焚身刑(분신형)을 당하는 희생을 치렀다.
이런 끔찍한 과거사를 모를 리 없는 김춘추다.
이렇듯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줄곧 원수로 지내오는 왜국….
더구나, 육지로 이어져 있는 고구려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일본서기”가 말하듯, 만일, 왜국이 김춘추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면, 제 아무리 김유신이라 할지라도,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으로, 구원대를 끌고 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 極惡(극악)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춘추가, 왜국으로 향했다.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는 왜국으로 갔을까? 당태종이 매혹당할 정도로 사려가 깊은 김춘추다. 그런 그가, 무작정으로 왜국에 갔을 리는 없다. 단신으로 바다를 건너 간 그의 가슴 속에, 대체 어떤 묘책이 있었을까?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우리의 의문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거기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앞에서 소개한 몇 줄 안 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서기”는 왜국 朝廷(조정)에 간 김춘추가,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담소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제 아무리 話術(화술)에 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해 주는 사람 없이는 담소할 수 없다. 즉 김춘추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응대해 준 사람이 있었음을, “일본서기”는 짐작케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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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명인 구영국교수의 전통문화산책(10)
한국의 활쏘기는 언제부터였을까 한국의 활쏘기가 왜 세계를 제패했는지에 대하여 아는 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온 세계를 놀라게 하는 위대한 한국양궁의 근원과 뿌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역사는 이 답을 말해주고 있다. 임진왜란 중 선조는 훈련도감에서 여섯 가지의 무기를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곤봉, 쌍수도, 등패(등나무로 만든 방패와 칼 표창을 함께 사용하는 것을 말함), 삼지창(당파), 낭선(9~11개 가지가 만들어진 창), 장창 이었다. 당시 이 무기들은 근접전에서 쓰여 진 무기였는데 많은 군사들이 이를 잘 다루지 못하여 미숙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선 이 단거리의 무기다루는 훈련과정의 재검토를 신중히 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일상적인 풍속중 하나가 바로 활쏘기였는데, 활쏘기보다 새로이 도입한 가까운 거리의 전투 시 창검을 다루는 훈련을 하다 보니 ,숙련돼지 못한 전투력으로 인해 훈련의 성과와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므로, 병조에서는 앞서 애기한 여섯 가지 무기를 다루는 것보다 활쏘기를 주 전력전술로 교육할 수 있도록 임금에게 간해서 다시 활쏘기를 주 훈련교육으로 바꾸게 된다. 이로서 새로운 무기를 잘 다루지 못한 것은 나중에 근접전투의 역사 속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동이족(동(東夷族)이라고 불렀다. 동이족의 본뜻은 ‘오랑캐’란 뜻이 아니라 ‘동쪽의 큰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동이의 이(夷)자를 풀어보면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임을 풀어서 알 수 있다. 흔히 우리들은 동이족의 개념을 잘 못 알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 고려를 세운 왕건,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모두 활을 귀신처럼 잘 쏘았던 인물들이다.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신궁(神弓)이라 불렀는데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활쏘기의 명수들이었다. 왕이 되려면 활을 잘 쏠 줄 아는 민족적 특징과 더불어 리더의 필수 기량이 필요 했다. 아무나 왕이 되는 일은 역사에 없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산악지형이 지배적이어서 근거리전투보다 원거리전투에 용이한 궁술이 특히 발달 하게 된다. 평평한 땅위에서의 평 전투보다 산을 둘러싸고 거리를 두고 싸웠던 산성전투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궁술은 군사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제일 중요한 전쟁의 기술이었고, 힘 이었고, 무관의 벼슬길이었다. 우리는 온 백성이 활쏘기에 전념한 활의 민족이다.
우리는 칼의 민족이 아니다. 활의 명수인 활의 최고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의 활쏘기는 세계양궁대회에서 금메달을 꼭 걸고 오는 위대한 활의 최고민족이며 후손이며 자손이다. 이것이야말로 태초의 역사와 함께 진정으로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
삼국시대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활쏘기는 활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이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기능을 보존해가고 있다. 역사는 지금도 이처럼 계속 이어 진다.
일본은 화살촉에 금칠(일본에서는 ‘황칠’을 ‘금칠’이라고 부른다)을 하여 무기를 만들었는데 정확히 화살 끝부분인 촉에 0.026mg을 칠했다. 촉이 부식되어 망가지면 화살로서의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이 황칠을 그야말로 담궜다 빼는 정도의 소량을 입히었다.
황칠이 아주 귀하다보니 마음대로 많이 칠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려니와 이 황칠은 전쟁의 도구보다는 어느 면에서 천황의 기물에 더 많이 사용되어 졌으리라 여겨진다. 선조가 가슴을 쳤던 일제시대 우리의 보물인 황칠이 수탈되고 통 크게 흔적 없이 사라진 역사의 아픔을 뒤로해보아도 전쟁의 중요한 무기였던 살상무기 화살에, 우리의 황칠을 일본 군졸들이 사용했다는 사실은 비극을 뛰어 넘어 웃지 할 통한의 변이다. 많은 우리 황칠의 유실은 알고 보면 결국 일본의 화살촉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수년 전 필자의 분당 집으로 일본 옻칠장인과 경영자들이 다녀간 적이 있다. 몇 년 전엔 미국, 독일, 중국, 이태리, 프랑스, 인도, 포루투갈등 각국 나라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단정한 귀빈실에 전시된 황칠 작품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장면을 보고 한국의 황칠은 활쏘기만큼 큰 우리의 자랑으로 됐다는 것임을 생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세상엔 훌륭하고 귀한 것이 각 나라마다 많이 있다. 또 각기 나라마다 자랑은 다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 전통기술은 세계인을 충분히 감동시키고 남음이 있다. 뛰어난 한국인의 기예와 예술정신은 하나뿐인 지구의 행복도 살릴 수 있다.
이젠 그런 시대가 왔다. 켜켜이 세월의 때가 묻은 선조들의 고문서를 보면서 민족은 잘 화합하고 절절히 묻어나는 조상의 종묘와 사직에서 이제 피어나는 봄꽃이 경건해진다. 왕비의 머리장식인 떨잠은 분노로 떨지 않으며, 국왕의 익선관은 슬픈 역사위에서 화산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우리의 백성들은 전통과 역사와 문화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새 역사를 이어간다. 힘들고 지치고 커다란 통증이 와도 그 누군가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그것이 진정 우리의 길이라면 전통의 장인은 그 길을 역사와 함께 가고 있다.
-필리핀 국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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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문화 창조 역사
세계 역사상 문자를 공식적으로 4번씩이나 만든 민족은 우리민족 밖에 없다. 세종대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을 창제 하실 때, 가림토문자 38자에서 20자나 모방 하였다는 사실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서 밝혀져 있으니 입증된 셈이다.
이두문자 또한 선조들이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니, 더 이상 신라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이두문자의 총 정리자 “설총”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일본의 오래된 절인 이세신궁이나 중국의 오래된 사찰 등에서 가끔 발견되기도 하는 가림토문자 또한 선조들이 만든 문자이다.
가림토문자(38자)를 그대로 사용하든지 아니면 한글 28자를 옛날처럼 전부 사용하게 되면 짐승의 소리까지도 흉내 낼 수 있다고 하니 선조들의 지혜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짐작이 간다. 지금 한. 중. 일이 같이 사용하는 한자(漢字)도 기록에 의하면 동이족인 우리 선조들이 만든 글(契)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호상 박사가 문교부장관 시절 대만을 방문하여 “임어당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민족은 한글을 사용하여 너무나 편하다고 하며 한글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도 마음대로 발음할 수 있는 편리한 문자임을 자랑하면서 한자의 어려움을 한글과 비교하며 말 했더니, 임어당 선생이 정색을 하며 말하길 “한문도 동이족인 그대들의 선조가 만든 문자인데 왜 한글 만 자랑하느냐”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 은 공식적으로 네 번(한글. 이두문자. 가림토문자. 한자)씩이나 문자를 만든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 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선조들의 후손됨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들 즉 황국사관에 젖은 사람들이나 수십 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정권을 쥐고 있던 자민당에서는 마치 일본 사람들이, 섬에서 자생 하였거나, 중국이나 유럽 부근으로부터 와서 일본을 건국하였고, 지금 사용하는 말 또한 우랄알타이계와 다른 것으로서 독특하다고 선전하며 천황도 만세일계라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 정치인들이 일본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해의 뿌리라는 뜻의 한자표현이며, 국기 또한 붉은 태양을 뜻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서기 670년경에 정해졌다고 일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당시에는 이라고 표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이라고 읽은 것이 아니라, 라고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서기 750년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 萬葉集(만엽집)에 실려 있는 노래에 한자로 이라고 표기돼 있는 모두가 라고 읽혀져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인다면, 는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번창했든 우리의 고대부족국가(우가야)의 국호로,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지금의 지방에 정착하고, 그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우리조상들이 붙인 이름인 것이다. 지금 그 지역을 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우리조상들이 그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가야인은 슬프다”중에서: 박병식 저)
참고적으로 말하면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유일할 정도로 태양을 좋아하고 숭배하며, 태양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도 스스로를 “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원래는 “라”였다.
“라”에서“ㄹ”이“ㄴ”으로 소리 바꿈 하여 “나”로 되었다. 즉 “라(나)”는 태양이라는 뜻이며, “이집트” 에서는 태양신을 말한다. 태양의 옛 표현 말은 “아. 하. 라”였는데 아버지의 “아”와 같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민족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인 “아리랑”은 바로 “태양처럼 높으신 님, 즉 하나님” 을 뜻하는 순수 우리 고어인 것이다.
일본사전에 국호 “일본(日本)”(태양의 뿌리라는 뜻) 이 말은 “삼한에서 사용하던 말로써 그 뜻이 아름다워 만년에 변치 않을 국호로 삼는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니 일본말 전체가 우리의 옛 가야 말인 것은 분명하며 우리말과 똑같은데,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모음이 3개(ㅡ,ㅐ,ㅢ) 빠져 탈락함으로 인하여 변화된 것이다.
예:1.사람을 졸졸 따라다닌다.=日本: 조로 조로
2.물건을 슬슬 끌어당긴다.=日本: 스루 스루
3.터벅터벅 걸어간다. =日本: 도보 도보
요즈음 중국 공산당정권이 우리민족의 상고역사를 훔쳐가서 자기네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과 “탐원공정”등 몇 가지 공정들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밑작업을 해왔다는 것이 최근에서야 들통 난 것이다. 왜 그들은 그들만의 역사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족들이 아무리 땅이 넓고 큰 나라라고 잘난 척해도, 역사가 훨씬 길고 오랜 문화선진국인 조선족의 수준으로 보면 항상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하게 역사를 알고, 자부심이 강하며, 언제 또 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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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명인 구영국교수의 전통문화산책(9)
달포 만에 숲속에 들어서니 귀여운 작은 박새가 봄으로 녹는 대지위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이 나무 저 나무를 계속 옮겨 다니며 구역의 경계로 텃새 질을 한다. ‘거리’라는 헬기를 타고 바라본 먼 남해 바다 밑에선 푸르게 시린 정어리 한 떼가 맨 앞 주장인솔자를 필두로 우리나라 바다 밑을 재미있게 어종조사인 듯 순찰하고 다닌다.
깊고 고요한 산 속 잔잔한 사기 장인이 빛은 백자도자기 옆에선 화금청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불그무레하여 수줍은 홍매가 꽃망울을 힘차게 터트리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궁궐 옆에선 노란 개나리가 바람을 가르며 사르륵 사르륵 피어나고 있다.
국보1호인 남대문 복원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보물1호인 동대문 앞길엔 반원형을 돌아가며 앞으로 줄줄이 나가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각자 제 갈 길로 오가며 오늘도 하루 내 내 숨 쉴 겨를 없이 매우 분주하더니 국토의 하단아래 목포의 야간 멸치잡이 그물처럼 바쁘다.
분주하긴 궁중연회에 등장했던 우리의 학(두루미)도 매한가지이다. 3월초면 궁의 천정 그림에서 떠나 시베리아로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학은 십장생 중에서 유일한 아름다운 새인데 전 세계 14종류가 있다고 한다. 현재 지구상엔 몇 백 마리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전만하여도 수천마리가 11월 하순에 겨울을 나려고 해마다 시베리아나 몽골등지에서 먼 거리를 날아서 우리나라에 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개체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아서 안타깝게도 세계적으로 각 나라마다 관심을 갖고 지극히 보호해야 할 희귀 조류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인간의 못된 욕심 때문에 머리가 빨간 피부를 가진 역사적인 새가 희생되고 사라진 결과이다.
무자비한 사냥총에 의해서 그러하고, 극한 독극물 농약에 의해 그렇고,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을 놓은 올가미에 의해 수없이 죽고, 무자비한 개발에 의한 서식지의 잠식으로 말미암아 상당수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던 두루미가 척박한 땅위에 죽었다. 이럴 즈음 멸종 위기를 염려했던 일본은 오래전부터 인공부화를 통한 연구를 활발히 지속해 오고 있었기에 두루미 보존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그나마 겨우 빛을 찾고 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랜딩기어에 가해지는 압력은 무려 100톤에 가깝다. 두루미가 지상에 착지할 때는 발을 밑으로 쭉 뻗어 몸을 세우고 긴 날개와 꽁지를 펴서, 날라 오던 바람의 막강한 저항을 삭이며 가속도를 줄여 천천히 내려앉는다. 비행기 역시 땅에 착지 할 때에는 큰 양쪽 날개를 밑으로 내린다. 이렇게 바람의 저항을 이용하는 것은 두루미나 비행기나 매 일반이다.
몸이 무거운 두루미는 여느 작은 새처럼 자신의 날개 힘으로만 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하는데 바람이 부는 쪽으로 목을 앞으로 빼고 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움직여 반복적 추진력을 통한 전력질주로 이륙한다. 그 무겁고 커다란 우리의 비행기의 이륙원리도 매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일하다. 이는 동물의 행동이나 인간의 기계적 생태행동학이 같다는 애기이다. 따라서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의도되지 않은 자연행위와 의도된 행동이 틀리지 않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루미의 울음소리는 무려 3km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알이 태어나 기뻐서 소리 질러 우는 울음소리하고 암수 짝짓기 할 때 서로 좋아 죽고 못 살아 우는 울음소리는 분명히 다르다고 한다.
또 두루미의 암 수 구별은 울음소리로 알 수 있다. 수컷이 한번 울고 나면 바로 이어서 암컷이 두 번 울기 때문인데 구별법은 그 소리가 한번 ‘뚜룹’ 하고 두 번 ‘뚜르르’이다.
두루미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장수의 개념인 십장생의 관점에서 보는 수명이 150년이지만 실제 150년을 살고 죽었는지는 아직 확인 된 바가 없는데, 인공적으로 최적의 환경을 보호한 동물원에서는 82년을 산 적이 있다하나 대략 야생 두루미의 수명은 30년에서 50년의 수명으로 보고 있다. 만약 자신이 새라면 어떤 새 이고 어떤 자태이고 싶을까.
두루미의 자태는 신선의 자태라고 했다. 신선이 학을 타고 있는 그림은 천상의 세계에선 무릉도원이 아니런가.
두루미는 봉황처럼 절대 썩은 먹이를 먹지 않는다. 썩는 다는 것은 병이 드는 것이고 병이 들면 생명이란 것을 심장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관료의 관복 흉배에, 궁중 그림과 민화와 십장생그림에, 샤머니즘의 이해 논리에 접하면서, 국왕의 집무실 천정에, 사찰의 엄숙한 공포에도 학은 늘 살아 있으며 존재해 왔음을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잊지 않고 있다.
봄이 이처럼 연민으로 전통 가슴속을 파고드는 지금 우리가 학(두루미)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보니 행복해 진다.
그리고 필자가 아는 사랑하는 이웃 지인들 모두 어느 좋은 길일에, 슬픔이 없는 천상의 이상세계로 학과 동무하며 순수하게 소풍 갈 수 있는 저 하늘 길에, 천년을 같이 가야하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잘 여며가는 사람들이었으면, 이 봄 정말 좋겠다.
-필리핀 국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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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昔氏王族의 600年 秘史"
새삼스레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내용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읽어 보노라면, 너 나 없이, 매우 이상스럽다는 느낌을 가지게 마련인 대목이,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創國記錄(창국기록)부터가 그렇다.
東明王(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나, 溫祚王(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하게 된 사연, 그리고 신라를 세운 朴赫居世(박혁거세)에 관한 설화 등, 그들 세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자세한 기록을 하여 두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보다 2천여 년이 앞섰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통일조선의 創建(창건)에 관해서는, 오직 중국사에서 인용한 記事(기사)가 몇 줄 있을 뿐이니, 이 어찌 怪異(괴이)하다 않겠는가?
그 탓으로, 우리의 건국사는, 애매모호한 소위 단군신화 속에 파묻혀 있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檀紀(단기) 4334년 대신, 우리민족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西紀(서기) 2001년을 맞이하게 돼 버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의 檀君史(단군사)를 소홀히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의 大罪(대죄)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어찌 보면 단군사의 누락보다도 더 엄청난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文武王(문무왕) 2년(서기 662년) 2월조를 보면, '本彼宮(본피궁)의 財貨(재화)-田莊(전장)-奴僕(노복)을 中分(중분)하여, 그 반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줬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본피궁이란,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昔氏王家(석씨왕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석씨왕가의 모든 재화와 노복들마저 모조리 나라가 몰수하여, 그 절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이 느닷없이 삽입된 기사는, 실로 알지 못할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기 662년이라면, 數百年(수백년) 동안 혈투를 계속하여 오던 숙적 백제를,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끝끝내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 경사스러운 때다. 그런 국가적으로 기쁜 때에는 으레,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상식일 텐데, 오히려 전례가 없는, 석씨왕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단행됐다니 어찌된 일인가?
왜 하필, 이 더 없이 기뻐해야 할 때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신라 三王家(삼왕가)의 하나인 昔氏王室(석씨왕실)에 대하여, 문무왕은, 그토록 무자비하고도 가차없는 철퇴를 내렸을까?
문무왕은, 석씨왕실에 대한, 서릿발 같은 날벼락 처단을 집행한 다음 달인 3월이 되어서야, 죄인들에 대한 전국적인 사면을 선포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석씨왕실의 재산을 몰수한 사실만을 기록해 놓았지만, 사실은 이 때, 석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석씨는, 전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도, 8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1985년 통계) 稀姓(희성)으로 전락돼 있다.
신라의 3왕실 가운데서, 김씨와 박씨는, 그 자손이 각각 880만명과 350만명에 가까운 방대한 수를 헤아리는 大姓(대성)으로 자라난 사실에 비춰 볼 때, 석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혹한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한 사람 또는 몇몇을 처형한 것이라면 모르되, 석씨 전체에 대하여, 지금 생각하여도 끔찍하고도 소름이 끼치도록 처참한 처분이 취해졌다면, 거기에 대하여, 그 당시의 온 나라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왜 석씨왕실뿐 아니라, 모든 석씨에 대하여, 그토록 혹독한 처벌을 내렸는가에 관하여, 편찬자는 단 한 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더욱 주목해야 할 일은, 김내물왕(金奈勿王)이 왕위에 오른 서기 356년부터, 고려가 건국된 때까지, 거의 600년 동안의 우리나라 역사에는, 석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문중에서, 侍郞(시랑) 昔載興(석재흥), 兵部令(병부령) 昔時宗(석시종), 左僕射(좌복사) 昔運尼(석운니), 密直司(밀직사) 昔漢一(석한일) 등이 연달아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려조에 들어선 다음, 文宗(문종) 때가 지나서부터이다.
더구나, 석씨족보에는, 昔脫解(석탈해)의 23世孫(세손)이라고 하는 석재흥이, 始祖一世(시조일세)라고 되어 있을 뿐, 석씨왕실의 마지막 임금인 訖解王(흘해왕)의 손자 恬(념)과 姓(성) 이후, 석재흥에 이르는 계보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석씨족보의 공란 뒤에는, 석씨 조상들이, 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겪었으면서도, 문자로는 한 마디도 자손에게 남기지 못한, 기막히도록 서러운 사연이 적혀 있을 것이며, 후세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애절한 호소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가 밝히지 않았던 석씨들이 겪은 참변의 실상을, 일본 古代史(고대사)와 옛 문헌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열쇠로 삼아 파헤쳐 밝혀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600년에 걸친 놀라운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독자는, 이 글을 읽어감에 따라, 오늘날 일본이라고 불리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보면, 바로 우리와 핏줄로 이어져 있는 겨레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두 나라 사람들이, 신라가 건국한 때부터 시작하여,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650여년 동안, 왜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21세기로 발을 내디디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전후 약 6년(서기 1592~1597년) 계속됐던 임진왜란이나, 36년 동안의 일본식민통치를 운운하기보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기막힌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 직시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우리 고대사의 참 모습을 되찾는 슬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 이상 지난 오늘까지도,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 이 구석 저 구석에는, 아직도 서먹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일 정치인들의 안목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나도록, 일본고대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게을리하고 있는 우리 사학자들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두 나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끈질긴 더덕때를 말끔히 씻어 없애는 세척제가 되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여러분 앞에 보내려 한다.
21세기를 맞이한 인류는, 지금 우주식민지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섰다.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고 생각한 ‘아이작 뉴턴’의 "왜?" 하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뉴턴’의 "왜?"는, 대우주의 만유인력법칙을 발견케 하여, 인류의 꿈을 무한한 우주공간 속으로 뻗어 나가게 했다.
그리고 이 글에 담겨져 있는 숱한 "왜?"는, 망각의 時海(시해) 속에 파묻혀졌던,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되찾게 해 줄 것이다.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故 박 병 식
자료제공 한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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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 물품비만 있으면 창업 가능”
최근 창업시장에서 열정과 전문성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소자본 창업이 가능하게 하는 기업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창업이라는 도전을 감행하곤 하는데 이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이 체인본사의 건전성과 투자에 대한 수익성 그리고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꾸준한 지속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기자가 찾은 업체는 이러한 사안을 모두 만족하고 있으며, 소자본 창업이라는 또 다른 매력과 체인본사에서 요구하는 보증금과 시설비가 없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주)신일식품(대표 김연암)은 여주(암팔라야, 주 서식지 필리핀, 일본명칭: 고야)라는 열매를 주 재료로 당뇨와 다이어트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당하차를 개발하여 체인점 방식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업체이다.
여주(암팔라야)는 의약품이 아닌 천연식품으로 과거부터 원기회복과 질병치료를 위한 민간요법의 재료로 활용되어 왔으며, 특히 펩타이드성 물질인 카라틴과 식물인슐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당뇨병에 좋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한 번의 복용으로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복용이 이어져야 하는 자연식품으로 지방분해를 촉진시키며, 레몬이나 딸기에 비하여 비타민C가 4배가량 많이 함유되어 있고 가열을 하더라도 성분의 변화가 미미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 유기농재배로 생산한 국내산 재료를 티백형식으로 만들어 보리차처럼 끓여 먹을 수 있는 당하차로 출시하여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창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주)신일식품은 창업에 있어서도 초도 물품비만 있으면 창업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창업조건의 거품을 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주)신일식품 김연암 대표는 “앞으로 여주를 이용해 다이어트제, 숙취해소제, 항암효과제를 개발 출원예정이며, 추가로 여주음료를 출시할 예정에 있다”며 “여주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건강식품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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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역사만 신화인가?”
기원전 3000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이집트 파라오의 하루는 목욕재개부터 시작하여, 국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숫 하마 잡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고(왕 제도 이미 존재) 또한 그때의 “풍요와 즐거움의 극치” 가 파피루스에 기록 되어 있다.
기원전 2700년경 에는 제2왕조 때인데 이때부터 태양신 “라“(Ra :라 =나)를 처음 숭배하기 시작 하였고 새로운 건축기술이 발달하여 당시 행정담당 서기들의 글과 그림이 파피루스에 남아 있다.
기원전 2500년 쿠푸왕 때는 20년이 걸려 2.5톤짜리 돌 230만개로 대 피라밋이 완성 되었는데, BC 5세기의 그리스 기록에는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라고 기록 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의 역사는 그리스인들이 많이 왜곡 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들은 서양 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또 나일강을 이용하여 돌을 옮기며 시나이반도에서 아스완과 더 밑으로 누비아까지 땅을 개척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각품 중에 유리로 만든 “눈“과 미 이 라 의 부패방지를 위한 특별 처리까지 하였다.
BC1279~BC1212 파라오 “세띠”의 아들 람세스 대왕 때는 쌍으로 쏠 수 있는 활이 개발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돌을 쪼개고 다듬는 기술이 개발되어 실용화 된 것이 이미 1000년 이 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한편 아시아의 우리민족 시조 중 한사람인 치우천황은 기원전2700년 경 에 이미 청동기로 무기와 갑옷과 농기구를 만들고 사용 하였지만(동두철액: 머리는 동이며 갑옷은 쇠) 신화로만 기록되어 알려지고 있다.
은나라 때의 “기자가 조 선 으로 갔다” 는 그 조선이 어느 지역이며, 태양족인 우리민족이 살았던 곳 마다 “광명 의 땅 (아사달)”으로 이름 지어, 조선. 부여. 가라(야). 한. 북경. 조양. 평양. 왜. 일본...등으로 기록된 우리 고어가 한자(漢字)로만 표시된 것을 언어학으로 연구 하지도 않는다.
치우천황 보다 약400년 후의 인물인 “단군”(기원전 2333년)도 신화로 만들고, 마치 곰과 호랑이가 변해서 사람이 된 것처럼, 유전학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은 억지 표현을 하였고, 비유법 을 직설법으로 의도적인 해석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무리하고 고의적인 왜곡된 해석인가.
또한 기원전 551년의 공자와 기원전 372년의 맹자는 대나무에 “옻“으로 글을 써서 기록(과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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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명인 구영국교수의 전통문화산책(8)
오랜만에 대지위로 단비가 내렸다. 이제 곧 봄이 오고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로움이 인간생활에 축복과 풍요로움과 위대함과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봄이 달려오면 당장 맨발로 뛰어나가서 제일먼저 누구를 맞이할까? 생각만 해도 사뭇 즐거운 일인게다.
아침 이슬을 먹고 사는 달팽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반딧불이가 나들이를 간 후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아대는 소리에 노루가 잔뜩 긴장을 하고, 멧돼지가 꼬리를 흔들며 촉각을 세워 경계를 하고, 팔색조가 후박나무위에서 멀리 먹이를 향해 집중하고, 산양이 계곡 바위에서 동료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로 선 보초를 선다. 자연의 이치는 우리가 사는 만큼이나 지구를 순환적으로 자연현상을 보호 하고 있다.
자연의 위대함은 얼마나 무한적인가. 산과 바다, 태양과 대지, 바람과 구름, 인간과 동물 등 어느 하나 지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잡힐 듯 말 듯 한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떨어져 지하수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된다. 빗물이 모이고 모여서 큰 바다가 되니까 바다란 결국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 이다. 그러니 결코 크다 하여 자랑하지 말고 작다하여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크고 작은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한 속 이다.
앞으로 우리 인간들은 해저도시를 건설하고 우주를 개발하여 우주공간에 집을 짓고 사는 날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와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
우주의 평균온도는 섭씨 영하 270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비해 지구중심부의 온도는 약 5,000도를 넘지 않고, 우주의 나이는 약 150억 살 이지만 지구는 약 46억 살 이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 하는 반면 은하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은하는 빛(세상에서 가장 빠른 물체)의 빠르기로 움직이는데 은하가 있는 곳이 바로 우주의 끝인 셈 이란 것도 알아야 한다.
이 은하엔 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하고 각각의 은하에는 또 천억 개나 되는 별들이 있다고 하니 이 은하계 일원의 하나인 지구에 살고 있는 위대하다는 한 인간도 대우주 앞에선 전혀 조금도 위대 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공을 쌓듯 마음을 내려놓고 늘 겸허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여름밤 옥상에서 반짝이던 별들은 저마다의 색깔이 각기 다 틀렸는데 그것은 별의 온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별에도 일정한 수명이 있는데 수십억 년이 지나면 빛을 잃고 사라진다. ‘신성’은 바로 이러한 별의 현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 전통의 중요한 품위 부분을 애기하고자 한다. 그럼 전통의 품의라는 측면으로 접근해보면 고유의 황칠달항아리는 그 대상으로 적격이다. 설명되는 이유는 이렇다.
황칠달항아리는 햇볕이나 백열전구 밑에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칠흑같이 어두운 깊은 밤에 수려하고 은은한 달빛아래에서 감상해야 황칠달항아리의 최고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또 달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황칠의 금색과 절묘히 조화되면 한없이 상상할 수 없는 흡인되고야마는 바로미터 감흥에 젖는다. 따라서 이것은 여기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감수성과 기술성과 예술성을 접하게 됨과 동시에 전통문화의 보존이 이토록 절실하게 해야만 하는 까닭에 연유하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바람이 부는 어떤 달밤에 지인과 소박한 약주 잔에 달을 담아 마신 적이 있다. 잔속에 들어 있는 달에는 자꾸 보면 볼수록 또렸한 나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언제나 부정할 수 없는 백제황칠장인의 모습이었던 것을 후에 세월과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혀 지지 않는 장인의 제 모습은 선조와의 교감의 모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항상 부족한 제 자신을 생각하며.
필자는 ‘달맞이하러 가자’ 는 말을 참 좋아한다. 왜냐면 달에는 토끼의 꿈과 희망이 있어서이고 견우와 직녀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제일 으뜸의 생각은 북두칠성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 우리민족의 지주 정신이 되는 ‘아리랑’이 있어서이다
달에는 정성을 들여 희망이 잇고 달빛에는 감흥이 있어 황칠달항아리가 살아 있다. 달맞이하러 가는 것은 한 속인 황칠달항아리를 보러 가는 것이다.
이태리의 가죽장인은 한사람이 하루에 혼자 한 개의 가죽핸드백을 만든다. 전부 모든 공정을 혼자 다 해서 완성 한다. 이른 바 명품핸드백이다. 꼼꼼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존경해야할 장인정신이다.
우리나라에도 이태리 장인이 부럽지 않은 훌륭한 장인이 각 분야에 많다. 다만 아쉬움이 있어 말하자면 명품을 만드는 국제적인 이름의 전통장인이 많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드는 천하의 명품은 우주의 별빛처럼 이와 같이 세상에 더욱 빛난다.
-필리핀 국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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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다리’라는 용어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동을 위한 수단’과 ‘강과 하천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목적물’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강에 놓여진 수 많은 다리들도 이러한 맥락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강에는 언제부터 다리가 존재했으며, 다리의 설치로 인한 이해득실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왕이 선왕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거나 온천을 가는 등 나들이를 할 때 큰 배 수십척을 동원해 엮어 그 위에 널빤지를 설치하여 기마 5-6필이 자유롭게 가로로 서서 건널 수 있는 부잔교를 세우곤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부잔교는 일시적인 다리에 불과하고 설치시에도 민간의 배를 동원해 설치에 한달, 해체에 한달이 걸리는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부작용이 많았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다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효과는 어떻게 표출되고 있을까?
서울을 기준으로 한 생활권의 확대와 교통량의 증가, 물동량의 확대로 인하여 다리의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나루가 번창하던 것이, 1897년 경인철도부설공사와 1899년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한강철교의 착공을 시작으로 현대식 다리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에서만 30개에 육박하는 다리가 세워졌고 한강 지류까지 따지면 수백개에 달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는 길이 26마일의 경인철도를 개통하며 설치 되었으며, 1900년에 정식 개통을 맞이하였다. 또한 경부선 복선화 계획에 의하여 1912년 제2철교가 준공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토목기술이 발달되어 개통된 다리가 아니라 외세가 침탈의 목적으로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이권쟁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술국치 6년 뒤인 1916년 최초의 인도교가 건설되었으며, 중앙차도가 4.5미터, 좌우보도 각 1.6미터로 기공 되었으며, 교통량 해소를 위한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 되었는데 폭 20미터에 길이는 10,005미터였다.
이렇게 설치된 한강의 다리들은 6.25를 맞으며 수난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서 수많은 사상자와 물량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1958년 재 가설로 다리의 기능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강의 다리는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돼 1970년 5월 16일 마포대교를 시작으로 구양화대교, 제2한강교 등 순차적인 준공을 보이며 한강 이남과 이북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도 한강을 잇는 다리들은 하루에 수백만의 자동차와 사람, 전철이 이동하는 중요 통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묵묵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있다.
다음호에는 한강의 다리에 대해 조금더 깊게 살펴보겠다.
류덕선 전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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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경교장 3월부터 공사 들어가
서울시가 1945년 해방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각료들의 숙소로 사용된 종로구 새문안길에 위치한 경교장(京橋莊)을 내년 8월 15일 광복절까지 완벽 복원한다.
경교장은 1945년 11월 중국으로부터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청사로 사용하던 곳으로, 김구 주석 서거 이후 미군주둔지, 주한 대만대사관저 등으로 사용되다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매입해 병원 건물로 사용해왔다. 이 과정에서 내외부가 크게 변형돼 복원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서울시는 지난 2010년부터 추진해온 경교장 복원이 오는 3월부터 원형 훼손된 벽체 철거를 시작으로 본격화 된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경교장 복원을 위해 그동안 강북삼성병원의 협조로 경교장 내 모든 병원시설을 이전 완료(2010. 6. 30)하고,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복원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복원 설계 및 문화재청 현상변경 허가(2010.10.13)를 완료했다.
특히 서울시는 경교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 귀국 당시의 모습으로 진정성 있게 복원하고,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경교장에서의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의 활동상, 경교장의 역사 등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번 경교장 복원은 상해(1993)-중경(2001)-항주(2007) 등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청사 복원에 이은 마지막 복원으로 일련의 임시정부 청사 복원에 방점을 찍게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항일 독립운동을 총 지휘했던 사령부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현재 중국 내에는 임시정부 관련 사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던 상해-항주-중경 청사가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중국 정부와 우리나라 독립기념관, 그리고 삼성 등 여러 기업의 후원으로 이미 복원됐다.
서울시는 복원 추진과정에서 경교장 전체의 원래 모습을 관련 사료 및 지적도, 관련 사진, 증언, 백범기념관 등의 고증을 거쳐 역사상 최초로 규명했다.
그동안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 1938년 발행)’ 등을 통해 경교장 내부는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경교장의 전체 규모나 원형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었다.
서울시의 조사 결과,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건물과 주차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공간에 넓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한옥도 1채 있었으며, 경교장 남쪽에 정문(주출입문)이, 동쪽으로 부출입문이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경교장 동쪽에는 연못·다리·차고 등 부대시설이 있었고, 경교장의 전체 면적이 5,267.44㎡(1,593.40평)나 되었던 것도 밝혀졌다.
서울시는 이러한 경교장의 원 모습을 누구나 알기 쉽게 모형으로 제작해 원래 모습과 복원될 경교장의 미래상이 궁금한 시민들에게 3월 1일부터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 2층 전시실에 모형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서울시는 경교장의 복원공사 현장을 광복절인 8월 15일과 임시정부 환국일인 11월 23일에는 국민들이 복원 진행과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현장을 공개할 계획이다.
현장 공개는 전문가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강북삼성병원에서 임시정부 청사로 원형 회복 중인 경교장을 직접 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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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2
유구한 한강의 물줄기를 전편에서 기술했듯이 한강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포용하고 있다. 이번 편에서는 선사시대의 한강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한강변을 따라 발달된 비옥한 옥토와 한강이 제공하는 수산물들로 인하여 선사시대에도 이미 한강을 기준으로 많은 문명들이 존재하였으며, 채집과 수렵이 동시에 발달되는 모습을 유적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면목동 구석기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유적이다. 아울러 한탄강의 전곡리 유적과 금강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대비되는 후기 구석기유적으로 서울 지역의 구석기 문화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 구석기인들의 일시적인 생활거주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은 면목지구 택지 건립을 위한 공사장 에서 1967년 황용훈을 비롯한 경희대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석기들이 약 30평 정도의 면적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로 인하여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발굴된 석기는 대부분 몸돌석기로 외날찍개·양날찍개·찌르개·긁개·망치돌 등이 있고, 격지석기로 찌르개 옆날긁개·끝날긁개 등이 있다.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을 살펴보면 토기와 석기 및 골각기 등이 발견되었으며, 구릉이나 야산에서 집중적인 채집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원초적인 어로기법인 낚시어법이나 자돌어법이 성행하여 창 또는 작살을 이용한 어로행위가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개인적인 단독기법으로 수확량의 한계가 있으며 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어망을 이용한 채집활동인데 여러 유적에서 근거가 되는 어망추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망을 이용한 어로행위는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행위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선사시대에도 이미 공동체적 활동과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공동체적 활동과 생활은 결국 대량생산을 통한 잉여생산물 축적과 환경에의 적응으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문화가 형성, 발전되며 결국 고대국가로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사시대의 한강유적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왕성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청동기문화를 거쳐 한강유역에 고대국가가 설립되는 밑걸음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호에는 청동기와 철기유적을 살펴보겠다.
류덕선 전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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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물줄기가 있다. 북으로는 금강산 부근에서 출발하고 남에서는 강원도 삼척시 대덕산에서 출발한 물줄기는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합쳐져 하나의 물줄기로 서울을 관통하여 황해에 이르는 대 장정을 형성하는 물줄기를 우리는 한강이라 부르고 있다.
한강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문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라고 불렸으며, 고구려에서는 큰 강이라는 뜻의 “아리수”, 백제에서는 “욱리하”, 신라에서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고 불렸으며, 삼국사기에는 “한산하” 또는 “북독”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도 했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으로 명칭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강”이라는 표현도 했지만, 한강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백제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국식 표기로 “한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굳어져 “한강”으로 정착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강”은 말 그대로 큰 물줄기, 다시 말해 큰 가람이라는 우리의 고어가 점차 변형되며 “한강”으로 정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한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직 없는 상황으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한강”은 수많은 지류들이 합쳐지는데 그 길이가 간선유로연장 481.7㎞, 법정하천연장 405.5km, 유역면적 2만 6018㎢(북한지역 포함 3만 4473㎢)이고 상류부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려 있으며, 남한강을 한강의 본류로 구분하고 있다.
남한강은 평창강과 달천, 섬강에 이어 청미천을 합류하며, 양화천과 복하천, 흑천을 어우른 후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북한강은 금강천과 금성천 등을 합치면서 흐르다가 서천, 수입천과 화천군의 지류들을 어우르며 춘천에서 소양강과 만나게 되고 다시 가평천과 홍천강과 합류한 뒤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어우러진다.
양수리에서 하나가 된 한강은 경안천과 합류한 후 팔당호에 머물다가 서울로 진입하면서 중랑천, 안양천을 어우른 후 김포와 고양의 경계선을 만들고 파주의 곡릉천과 만난 뒤 임진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접어들게 된다.
이처럼 장대한 여정을 거치는 한강은 주변에 비옥한 침식분지를 형성하게 되었고 곡창지대를 형성하며 흐름으로 인하여 과거 선사시대부터 문화발달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삼국시대 이래 쟁패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도읍지가 한양에 자리하면서 더욱 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강은 비단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만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강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주거지의 식수원을 공급하는 역할도 하고 있으며, 현재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상수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천연의 방어막을 제공하고 있어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며,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국가가 번영을 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류덕선 전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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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대 공용장비센터, “기업 신제품개발 해결사 등극”
동명대학교가 녹산공단에 설치한 공용장비센터를 통해 기업체들의 저비용 신제품 개발에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동명대학교 공용장비센터(이하 센터)는 지난 18개월 동안 145개사를 대상으로 모두 442건의 애로 기술 해결 등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1년 반 동안에 이들 기업에 총 30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제공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니콘미싱공업 나명선 관리이사는 “공용장비센터와 협력해 인건비 및 개발예산 1억2천만원 가량을 절감했습니다. 출시를 앞둔 해당 신제품의 매출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라며 신개념 산학협력에 힘입어 신제품(출시를 앞둔 신제품이라 제품명을 밝히지 않음)의 연구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유니콘미싱공업는 지난 3월 센터의 ‘기술교류회’를 통해 ‘기업맞춤형 기술 및 제품 개발 지원’소식을 접하고, 신제품개발 전체를 턴키로 주문키로 결정한 뒤 회사측 개발팀과 센터 직원들로 TFT를 구성해 10여 차례 기술검토회를 가지며 여러 난관을 극복한 끝에 계획보다 ‘3개월 가량 일찍’ 설계 및 시제품을 생산했고 그 품질까지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명선 이사는 “과거‘브라더미싱’본산지로서 회사 명예를 걸고 개발하는 이번 제품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며 “동명대가 실질적으로 우리 회사의 연구소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고 밝히고 “향후 개발예정인 최첨단 공업용 미싱 개발도 동명대에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완성도 높은 제품 개발과 신뢰성 기술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주창하고 있는 센터(센터장 윤대중 교수)는 신뢰성 기술 등을 기업에 지원하는 기술 전문 지원기관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센터는 지난 18개월 동안 145업체에 모두 442건의 기술을 지원해, 해당 기업들은 개발시간(장비가동시간) 23,920h을 단축했고, ▲설계비 절약 16억여원, ▲설계시간 절약 7억여원 ▲개발전체 등 모두 31억1천만원의 예산절감을 해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2010년 3월에는 중기청이 지원하는 ‘연구장비공동이용사업’의 주관기관에 선정되면서 기업체로부터의 신뢰를 더욱 축적하여 본 사업 시작 2개월만에 7개 업체 참여에 24건의 대형 수주를 올리기도 했다.
기존 교육기관의 아마추어식 기술이 아니라, 산업체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프로 지향적 기술 지원’을 모토로 센터구성원 모두를 관련전문가로 구성하여 산업체 요구기술에 즉각 대응토록 했기에 가능한 성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공용장비센터의 ‘정밀측정기술교육장’은 신뢰성기술 분야 대명사격인 정밀측정기사 국가검정자격증 취득을 위한 특강을 연 2회 실시하여 특강참여 응시자의 90%가 정밀측정기사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추풍령 이남의 유일한 정밀측정기술교육기관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동명대 산학협력단의 신동석 산학협력중심대학사업단 단장은 “초정밀분야 신뢰성기술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높아가고 있다”면서 “수많은 동남권지역 공단입주업체 편익을 위하여 동명대는 부산지역대학 최초로 신뢰성기술전문기관으로 도약을 위한 국내외적으로 권위있는 KOLAS(KOrea Laboratory Accreditation Scheme) 인증을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