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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2-09 21: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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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단거리패, 연극 ‘수업’

연극 ‘수업’은 현대 부조리극의 거장 외젠 이오네스코의 걸작으로, 부조리 연극의 시발점이 된 ‘대머리여가수(1950)’를 비롯, ‘의자들(1952)’ ‘무소’ ‘빈사의 왕(1962)’등의 대표작이다. ‘수업’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장 쥬네의 ‘하녀들’과 함게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식을 갈망하는 한 여학생이 교수를 찾아와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수학으로 시작한 수업은 덧셈은 잘하지만 뺄셈에서는 이상하게 계산하는 학생으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이상해진다. 급기야 언어학으로 과목을 바꾸지만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싶은 교수는 이가 아프다는 학생의 말을 묵살하고 수업만 진행한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소통의 부재는 심화되고 교수는 광분해 폭력을 휘두른다.

부조리극은 언어, 제도화된 언어에 갇히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의미를 가진 것이 당연한 언어를 의미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는 별도로 분명 의미 없이 나열되어지는 언어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가 아파요”라면서 점점 심해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학생을 향해 포악해질 대로 포악해진 교수는 더 이상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수업을 계속해야한다는 생각에 살의까지도 품게 된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은 어떤 벌이라도 당연하다는 듯.

소통의 부재가 낳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 포용되는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세상이다.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사실, 정직하게 제대로 말하기보다 배려한답시고 에둘러 말하는 일이 태반이다.

배려라고 하지만 상대를 위한다기보다 나중에 스스로 빠져나가기 위해서가 아닌지? 그런 말하기가 대부분이니 당연히 듣고 싶은 것만 가려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그걸 믿고 싶어 하니, 들을 때도 골라 듣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변명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닐까?

부조리극이 극단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 ‘말하고’ 있지만 ‘듣지’않으며, 제대로 ‘말할 줄’모르니 ‘들리지’않는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언제쯤 사람은 제대로 ‘소통’하게 될까?라는 질문과 함께.

연희단 거리패의 이승헌 배우는 배우다운 얼굴을 가졌다. 멀쩡해보이다가도 우스꽝 스러워 보이고, 젊은 교수 같았는데 금세 백발의 노인처럼도 보였다. 가끔 스톱모션으로 호흡을 빼앗는 연기는 재밌었고 광기에 치달아갈 때는 압도됐고, 살의까지도 당연한 듯, 연극 ‘수업’자체가 마치 배우 이승헌을 위해 쓰인 듯 작품을 지배하고 있었다.

배우 이승헌의 ‘수업’을 받고 싶다면 오는 16일까지 게릴라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연희단 거리패 고정 레파토리 공연으로, 번역 오세곤, 연출은 이윤택, 교수 역에는 이승헌이, 학생 역에 김아영, 하녀 역에 김아라나 배우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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