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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07 0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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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대한민국의 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역사이다.



1. 독도의 역사를 바로알자.(1)


독도가 대한민국의 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역사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까지 할양(割讓)받게 되었지만,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세 나라의 간섭으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조선에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러시아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러시아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조선 병탄(倂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 내 친러 세력의 입지가 확대되는 것을 염려한 일본은 결국 친러 정책을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게 된다.


‘삼국간섭’으로 인해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뤼순항(旅順港)에 있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4월, 일본은 일제 조선주차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같은 해 7월 주차군 사령관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함경도에 군정을 시행했고, 1905년 1월에는 일본군 헌병대가 서울과 그 부근지역의 치안 경찰권까지도 장악했다. 전쟁을 위해 군용 전선과 철도를 부설하고 그것을 보호한다며 엄한 군율(軍律)을 공포했다. 군용 전선이나 철도를 훼손하거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영흥만.진해 등에 요새를 설치해 군율을 공포하고, 요새로 지정한 지역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했다. 1905년 7월 일본군이 군용지로 사용키 위해 강제 수용하겠다고 한 땅은 용산.평양.의주 등지에 975만 평이나 됐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러일전쟁의 전략적 요충지인 울릉도와 독도가 강제 수용의 대상에서 제외될 리가 없었다. 러일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동해 해상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일본 해군은 1904년 5월 15일 전후한 불과 며칠 동안에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하게 된다.


일본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새로 군함을 건조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됐고, 긴박한 전황을 고려해 남아있는 군함만으로 효과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방안을 찾게 됐다. 대안은 해군기지 확보와 감시 망루의 설치였다. 적함의 동향을 면밀히 파악한다면 승산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작전 수행을 위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었다, 1904년 5월 18일, 일본은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울릉도 삼림벌채권을 빼앗도록 강요하면서, 울릉도에 대한 러시아의 기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 해 9월 1일에는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감시 망루를 각각 설치했고, 이어 독도에도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군함 니타카호(新高號)를 파견했다. 니타카호가 독도 현지 조사를 떠난 날은 9월 24일로,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자가 일본 정부에 ‘독도 영토 편입 청원서’를 제출하기 5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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