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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2-16 18: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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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중국국가미술관과 함께 내년 2월 17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 展을 개최한다.



[강병준 기자]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중국국가미술관과 함께 내년 2월 17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같고도 다른 : 치바이스와의 대화’ 展을 개최한다.


한중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치바이스의 걸작 80여 점을 포함해 중국 문인화의 거두 팔대산인의 작품 7점, 오창석 14점, 인물 조각으로 유명한 우웨이산(現 중국국가미술관장)의 조소 8점 등 총 116점의 걸작들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팔대산인 ‘학 사슴 오리 기러기[鶴鹿鳧雁]’ 4폭병, 오창석 ‘화훼책(花卉冊)’, 치바이스 ‘화훼초충책(花卉草蟲冊)’, 우쭈어런 ‘치바이스 초상’ 유화 등 한국의 국보에 해당하는 국가 1급문물이 4건 7점이 포함돼 있다. 


동아시아 서화미술의 핵심화두인 ‘필묵사의(筆墨寫意)’ 전통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재창조되어 오는가를 ‘치바이스와의 대화’로 살펴보는 것이 목적인 이번 전시에는 중국 문인화의 거두 팔대산인과 오창석의 진품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고학찬 사장은 “지난 2017년 경색된 한중관계의 물꼬를 트는데 큰 역할을 했던 ‘치바이스’展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해 우리 국민들에게 선보이게 되어 대단히 기쁘다”면서, “”이번 전시를 계기로 중장기적인 한중예술교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116점은 중국 유일의 국가미술관인 중국미술관(National Art Museum of China)이 소장한 걸작들로 모두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중국에서 조차 희귀한 팔대산인 주탑(朱耷, 1626-1705)의 작품 7점이 해외전시를 위해 한꺼번에 반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치바이스 스스로도 자신을 ‘팔대산인 문하의 주구’라 칭할 정도로 팔대산인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늘 전설처럼 거론되는 인물이자 명말청초 사의중심의 문인화 역사전통을 혁신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가 ‘사여불사(似與不似)’를 화두로 사의(寫意)그림의 역사전통과 창신의 맥을 ‘치바이스와의 대화 형식’으로 보여주는 만큼 위로는 팔대산인과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아래로는 우쭈어런(吳作人, 1908-1997), 리후(李斛, 1919-1975), 진상이(靳尚誼, 1934), 장구이밍(張桂銘, 1939-2014), 우웨이산(吳為山, 1962) 등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다섯 거장의 유화, 조소, 중국화와 창작 초안, 스케치 등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 중소형신(重塑形神) : 형신을 다시 빚다


‘치바이스의 인물 조형’ 섹션으로 우쭈어런, 리후, 진상이, 장구이밍, 우웨이산 등 중국 현대 다섯 대가의 유화, 조소, 중국화와 창작 초안, 스케치 등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다. 치바이스와 대화를 통해 그의 풍채(風采)와 신운(神韻)이 작가마다 어떤 창작방식과 표현기법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본다.



# 사고회통(師古會通) : 옛 것을 배워 훤히 알다


두 번째 섹션은 진상이의 ‘팔대산인’ 유화 시리즈와 우웨이산의 ‘오창석흉상’ 조소작품을 열쇠로 삼아 중국미술관에서 소장한 팔대산인, 오창석의 걸작들, 그리고 치바이스의 화제와 화풍과 관련 있는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관람객들은 작품들을 서로 비교 감상하는 재미와 함께 중국 예술의 주류에서 사의(寫意) 정신이 어떻게 이어지고 새롭게 창작 됐는가를 살펴보고, 예술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전달되어 창의력으로 변환하는지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이다.


# 화오자화(畵吾自畵) : 내 그림을 그리다


끝으로 치바이스 작품 50여 점이 회화의 소재, 표현기법, 미학적 취지 등을 고려해서 네 개의 단원으로 나눴다. 즉 인물화의 유희와 유머, 수족(水族)소재의 유유자적함과 사생(寫生)에서 사의(寫意)로의 변화, 화조초충화(花鳥草蟲畵)의 공필(工筆)과 사의(寫意)의 결합이 표현해 내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취미, 산수(山水)의 소재를 간필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영혼의 해방과 그 속에 남기는 의미 표현 등으로 꾸몄다.


#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



치바이스는 호남성 샹탄현 출신으로 일생동안 많은 자호(字號)를 사용했다. 본명은 치우앙(齊璜), 순지(純芝)이고, 자(字)는 위청(渭青), 빈생(瀕生)이며, 호(號)는 난정(蘭亭),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노평(老萍), 아수(餓叟), 차산음관주자(借山吟館主者), 기평당상노인(寄萍堂上老人),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를 바꿨다.


그의 전기는 유년에서 노년까지 일생 동안 드라마틱함 그 자체다. 치바이스는 1864년 중국 호남성(湖南省) 샹탄(湘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사일을 돕고 소를 치는 등 가사를 돕던 치바이스는 너무 어리고 힘이 약했기 때문에 열네 살부터 목공일을 배웠다. 목공일을 하면서도 일감이 없는 밤이면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스승을 만나 시작(詩作)지도를 받게 됐고 서른 살 이후에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시(詩), 서(書), 화(畵) 및 인장 조각 등을 독학으로 익혔다. 그런 만큼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출발은 매우 늦은 편이었다. 40대에 들어선 치바이스는 자연으로부터 영감(靈感)을 구하기 위해 전국의 경승지를 5차(1902~1916)에 걸쳐 두루 여행한다. 이 때 치바이스는 오창석(吳昌碩)과 같은 상해화파(the Shanghai School)인물들과 베이징의 첸시젱(陳師曾)과 교분을 쌓았다.


그의 그림은 우선 인물 중심의 세필화(細筆畵)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그 뒤 자연의 여러 모습과 생물의 동태(動態)를 이해하고 가늠해 수묵과 채색으로 표현했다. ‘사물의 겉모습만을 모사(模寫)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 ‘전대의 대가들의 그림을 세심하게 따라하는 것은 죽은 공부’라면서 외형모사나 답습을 철저히 경계했다. 치바이스는 97세에 작고했다. 80살이 넘어서야 그림다운 그림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죽는 날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 주탑(朱耷, 1626-1705)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 출신으로, 자는 설개(雪個), 호는 팔대산인, 개산(個山), 여옥(驢屋) 등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17번 째 아들인 녕헌왕(寧獻王) 주권(主權)의 10세 손으로, 명말 청초의 화가이자, 서예가이다.


청나라 초기 화단의 ‘사승(四僧)’ 중 하나이다. 1644년 명나라 왕실이 전멸하자, 주탑은 나라도 집도 다 망하는 아픔을 깊게 느꼈다. 그 후 23세에 승려가 됐다가, 54세에 환속해서 가정을 이뤄 난창(南昌) 남쪽에 ‘청운보(青雲譜)’라는 수도원을 짓고, 주지를 맡았다.


59세에 ‘팔대산인’의 별호(別號)를 쓰기 시작한 그는 산수화는 황공망(黃公望)과 동기창(董其昌)에게 배웠고, 화조화는 심주(沈周)와 진순(陳淳), 서위(徐胃)의 영향을 받았다. 60세 이후에는 자신의 풍격을 뚜렷하게 세워 중국 수묵 사의화에 있어 독립적이고 기이한 화법(畫法)을 창조했다. 그의 수묵 사의 화조화는 가장 전형적이고, 구도는 괴기하고 신묘하며, 필체는 두껍고 호탕하고, 묵색은 침울하고 호방하다. 화조의 조형은 과장되게 표현했고 정확해여, 상징의 필체로 인격화의 특징을 표현하고, 본인 신세의 심정과 도도한 심경을 표현했다.



#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저장성(浙江省) 안지현(安吉縣) 출신으로 초명(初名)은 준(俊)이고, 후에 준경(俊卿)으로 개명했다. 자는 창석(蒼石), 창석(倉石), 창석(倉碩)이며, 별호가 많다. 자주 보이는 것으로는 노창(老蒼), 노부(老缶), 부려(缶廬), 부도인(缶道人), 박과(樸果), 고철(苦鐵), 대롱(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오호인개(五湖印丐) 등이 있다.


중국 근대에 걸출한 예술가로 근대 화조화 주류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대 말 ‘후 상해파[後海派]’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쉬구(虛穀), 푸화(蒲華), 런보니앤(任伯年)과 함께 ‘청말 4대 상해파[清末海派四傑]’라 불리기도 한다. 오창석의 회화는 문인화를 집대성하여 전통 문인화가 근대사의 고봉이 됐다. 그의 작품은 기세가 드높고, 고아하면서도 힘이 있고, 문장이 간결하고 힘찬 화법을 개척했다. 서예와 전각(篆刻)에 정통하고, 기초가 튼튼해서 서예와 전각의 행필(行筆), 조소 칼 사용법과 글자체, 구성을 회화에서 융합한 것이 오창석 예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금석기풍[金石氣]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고, 후대 화조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 우쭈어런(吳作人, 1908-1997)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안후이성(安徽省)이다. 쉬베이훙(徐悲鴻)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930년대에 유럽에서 유학했다. 특히 소묘, 유화, 예술교육 분야에 조예가 깊었고, 말년에 중국 그림 분야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 일가를 이뤘다. 중앙미술학원 원장, 중국미술협회 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했고, 쉬베이훙에 이어 중국 미술계에 또 하나의 선구자가 됐다.



# 리후(李斛, 1919-1975)


본관은 쓰촨성(四川省) 다주현(大竹縣)으로, 화가이자 미술교육가이다. 쉬베이훙의 훌륭한 제자로서, 중국화의 묵필(墨筆)로 서양 화법의 사생을 견지하는 등 예술 방면에 있어 중국과 서양을 융합시켰을 뿐 아니라, 소묘의 기초 또한 탄탄했다. 리후는 중국화 회화 기법에 있어 독창적인 성과를 이룬 화가로, 수많은 야경 산수화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물 초상화에도 독창적인 성과를 이뤘다.


# 진상이(靳尚誼, 1934)


본관은 허난성(河南省) 자오쭤시(焦作市)이다. 중국 당대 유화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미술협회 주석과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예술실천과 주장은 중국의 대부분 유화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고전주의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중국 주요 3대 유화의 대표로서, 진상이는 인물화, 특히 초상화 창작을 탐색하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주제’라는 시대 명제에 대해 독특한 해답을 내놓은 예술가이기도 하다.



# 장구이밍(張桂銘, 1939-2014)


본관은 저장성(浙江省) 샤오싱시(紹興市)이다. 1964년 중국미술학원 중국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상하이중국화원(上海中國畵院)에 입학했다. 상하이중국화원 부원장과 류하이수(劉海粟)미술관 집행 관장, 중국미술가협회 중국화예위원회(中國畵藝委員會) 위원, 상하이대학(上海大學) 미술학원 객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장구이밍의 예술 창작은 서양 회화의 풍부한 색깔과 조형 구조를 융합시키는 동시에, 중국 전통 회화의 곡선과 필묵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작품의 색깔이 선명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있으며, 현대 중국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 우웨이산(吳為山, 1962)


본관은 장쑤성(江蘇省) 둥타이시(東台市)이다. 현재 중국에서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조소 예술가이다. 중국미술관 관장과 중국 조소연구원 원장 등의 직위를 맡고 있다. 그의 조소 작품은 여러 차례 국제적인 상을 수상했다. 홍콩 중문대학의 명예 원사와 한국 인제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영국 왕립조소가협회 회원, 영국 왕립초상조소가협회 회원, 러시아 예술과학원 명예 원사로 임용되기도 했다. 우웨이산은 중국 조소의 사의(寫意) 정신을 제기했으며, 날(捏)과 소(塑), 주(鑄)에서 실제 느낌과 모습 간의 균형이 정묘하게 실현되기를 추구해, 수많은 영혼을 뒤흔든 시대 조소와 문화의 명인 시리즈를 창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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