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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4-02 21: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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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풍요롭게 산다’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간혹 가진 것보다 본인에게 내재된 무한한 재능과 가능성이 눈부신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다재다능함과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영민함과 경계를 허무는 유머러스함까지...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술가라 칭하며 경외심을 갖는다.

[최상교 기자]‘인생을 풍요롭게 산다’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간혹 가진 것보다 본인에게 내재된 무한한 재능과 가능성이 눈부신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다재다능함과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영민함과 경계를 허무는 유머러스함까지...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술가라 칭하며 경외심을 갖는다.

 

강용진(27기) 대표가 딱 그렇다. 공군사관학교에서 중앙대 영어과로, 육군조종사에서 외국계회사 임원, 그리고 청소부에서 다시 사업가로. 드라마틱하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지만 나이 오십이 넘은 현재,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사업가이자, 시인 그리고 연기자로 화려하게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겠지만 그래서 한번쯤 동경할만한 남자의 인생.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에 앉은 강용진 대표는 겉모습뿐 아니라 영혼까지 반짝이는 흔치 않은 ROTCian이다.

 

2016년 10월 ‘ROTC 라이더스’를 창단한 강용진 대표는 현재 사당역 사거리에서 자동차 토탈케어업체인 ‘미르카’를 운영하며 자동차 및 오토바이와 밀접한 삶을 살고 있다. 동시에 2016년 9월 시인으로 등단한 필력과 감성을 갖춘 시인이자, 2014년 4월 예술의전당 오페라 무대에 오른 배우이기도 하다.

 

조종사의 꿈을 안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우여곡절끝 자퇴했고, 중앙대 영어과에 진학해 다시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군단과 인연을 맺은 그는 육군항공대 전투헬기조종사이자 군사영어반 교관으로 10년 10개월을 군에 몸담은 뒤 사회에 나왔다.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은 강용진 대표의 파란만장한 반세기를 들여다보며, 그래도 살만한 인생, 삶의 아름다움을 느껴본다.

 

# 조종사의 꿈 이루기까지

 

어렸을 때부터 조종사가 꿈이었던 강용진 대표는 어렵게 공부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생도생활이 시작됐지만, 당시만 해도 조종사는 출신성분(?)도 아주 좋아야 했는데 이북 강씨라고 할 정도로 남한에 흔치 않은 신천 강(康)씨라 조종사 되기 쉽지 않으리란 부정적 분위기로 의기소침해진데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교육 중 부상으로 공군사관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중앙대 영어과에 진학해 유치원에서부터 초중고교대학을 모두 중앙대학교 재단과 인연을 맺은 그는 비록 공군사관학교를 나왔지만, 조종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힘들었다. ‘학군단에 입단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육군헬기조종사도 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고교동창생들보다 2년 늦게 ROTC 27기가 됐다.

 

처음부터 장기복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강용진 대표는 학군단 생활도, 임관 후에도 뭐든 적극적이었다. 1987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ROTC 제대 지휘 연대장을 맡은 그는 삼군사관학교 연대장생도와 나란히 청와대 오찬행사에 참석해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ROTC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당당하게 요구, 후보생으로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면서 ROTC를 더욱 각인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포병 소위로 임관해 관측장교시절 집안에 우환도 생기고 그로 인해 한 달 남은 결혼도 파혼으로 끝났다. 하물며 BOQ에서 카드도난 사고의 피의자로 지목돼 참으로 힘든 전방생활을 시작했지만, 범인이 밝혀지는 동안 동기인 故 정재훈 중위(단국대, 1990년 3월 RCT훈련 중 물에 빠진 병사를 구하고 본인은 순직)의 위로와 격려는 큰 버팀목이 됐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남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중요한 인생 교훈을 얻게 됐다.

 

그럼에도 강용진 대표는 넘치는 끼와 적극적인 성격으로 임관 후 군에서 개최하는 각종 경연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부대에서 다재다능한 인재로 지휘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나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그는 오랜 목표인 조종사의 길을 가기 위해 계획대로 육군항공장교 선발에 응시해 합격하고 꿈에도 그리던 조종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경력관리를 위해 군사영어반에 입학했고 졸업 후 영어교관으로 발탁돼 드물게 학군장교로서 영어교관 임무를 수행했다.

 

한때 누명을 썼던 괴로운 시절이 있었던 그는 군영반 학생장교 시절 특정 출신 장교의 잘못을 대신 누명을 쓰고 괴로워하던 타 출신 장교를 대변해 졸업식 장에서 어학처장에게 그 장교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요구했고, 나중에 실제로 누명을 씌운 그 특정 출신 장교로부터 진실을 받아내는데 공로를 세웠으나 그로 인해 교관 시절 내내 미운 털이 박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의감에 충일했던 청년장교로서 불의를 보면 당연히 바로 잡는 노력이 필요했지만 현실에서는 다소 다른 현상들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재미있는 강의로 특히 중·대령반 학생들의 인기 교관이었던 그는 급기야 중·대령반 담임교관이 됐고, 당시 13기 이철휘 장군께서도 학생장교로 강 대위의 학생이었다면서 “그때 성적관리를 좀 더 잘해 드릴 걸...”하면서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시 맺은 인연으로는 여성최초 육군 보병 장군 송명순씨와 전 학군교장 및 기무사령관을 역임한 조현천 장군 등 전 현직 장성들이 즐비해 강용진 대표는 그냥 군대 있었으면 “아마도...”하면서 또다시 특유의 미소를 의미심장하게 지어 보였다.

 

강용진 대표는 군생활에 위기도 있었으나 나름대로 즐겁고 보람찬 군대생활을 이어갔다. 다소 튀는 그의 행동은 군대라는 조직에서 조금은 걸림돌이 됐고 창의적 발상과 정의감 그리고 그가 가진 능력이 때로는 특정출신의 견제나 몰이해로 인해 좌절될 때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나 또한 부족한 경험에 내 나름의 잣대로 모든 걸 판단하려 했던 잘못과 부족한 인성으로 인해 참고 기다리지 못한 우를 범 한 적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라 담담히 고백했다.

 

코브라 전투헬기 부대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던 그는 1999년 연평해전 당시 작전상 평택미군 기지를 오가며 열악한 한국군의 장비와 한계를 절감해다. 그럼에도 불철주야 최선을 다 하는 우리 군에 대한 애정이 오히려 더욱 깊어졌고, 그 해 8월 을지포커스 훈련 통역장교를 끝으로 전역을 결심한다.

 

# 코카콜라 보안팀장으로 외국계기업과 인연

 

강용진 대표가 전역할 의사를 개진했을 때 헤드헌터로부터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면접 때 알게 된 사실은 그 회사가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인 코카콜라였다. 면접에 당당히 합격해 전역도 하기 전에 세계에서 5번째로 큰 여주 코카콜라 보틀링 공장의 보안팀장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1999년 입사하자마자 IMF로 인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기업의 냉엄한 변화를 지켜봐야 했던 그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절도있고, 스마트하고, 능통한 영어실력 덕분에 주변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막상 군 출신임이 드러나자 주변의 평가가 엇갈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근무 태도나 PT 능력이 미국 유학파 같다고 칭찬하던 주변 동료들이 군 장기복무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참으로 엇갈린 평가에 또 다른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걸음걸이부터 말투, 심지어 PT때 포인터 사용요령까지 군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이 군 출신이란 걸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평가. 그것이 예비역 강 대위가 사회 초년생으로서 겪은 첫 번째 극복 과제였다.

 

‘아, 이것이 전역자들의 현실’임을 깨달은 그는 당시 군 출신에 대한 사회의 일부 부정적인 인식을 체감하면서도 군 경력이 핸디캡으로 머물지 않도록 자신이 가진 역량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냉담한 시선을 견뎌낸 그는 사교적이고 대화에 능숙한 자신만의 장기를 드러내면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아랫사람을 살뜰히 챙기고 항상 미소와 유머러스함을 유지한 그는 “안 되면 되게 하라” “하면 된다”라는 군대식 의지보다는 “안되면 되게 하라, 그래도 안되면 포기하고 되는걸 하라”는 나름의 융통성과 적응력으로 회사가 기대하는 성과를 달성했고,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재를 많이 양성했다. 결국 “그때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미르카의 충성고객이 되었다”고 강 대표는 밝혔다.

 

 

 

“군에서 배운 것을 제대로 응용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군에서부터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습득해야지요. 어설프게 군인 출신의 자만심을 안고 사회에 나오면 위험합니다. 벗으려면 다 벗어야지 어깨에 계급장은 두고 옷만 벗으면 사회에서 부담스러워합니다.”

 

빠르게 사회에 적응하다보니 군에서는 상상도 못할 제약이 없는 생활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서서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강용진 대표. 유난히 재주가 많은 그이기에 손만 뻗으면 예술로 승화할 거리가 많았다.

 

“직업적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할 줄 알고 그 외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한 가지가 제대로 메인으로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동차, 오토바이, 문학, 연기 등 다방면의 예술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 청소부로 입사해 임원으로 승진

 

코카콜라에서의 성과를 밑거름삼아 영국계회사 임원으로 추대된 그는 돌연 영국계회사가 철수하면서 직장을 잃게됐다. 나이 마흔이 훌쩍 넘은 부사장급 임원을 반길 회사는 많지 않은 현실. 몇 달을 고민한 그는 생계걱정에 택시승강장을 청소하는 야간 청소부로 프랑스 광고회사 JCDecaux에 취업했다.

 

JC데코는 ‘블루오션’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글로벌기업이지만 야간 청소일은 고됐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강남대로에서 광화문까지 줄지은 택시승강장의 유리판을 닦고 광고를 교체하면서 서울시 청소원들이 쓰레기를 쉽게 수거해 갈 수 있도록 취합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몸도 마음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겨울. 청소하기 위해 물을 뿌리면 물이 얼어붙어 시민들이 다친다는 항의가 빗발치자 동료들이 청소를 하지 않고 용산에 가서 대포 한 잔씩을 걸치면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누가 알던 모르던 계속 일한 강용진 대표는 바닥에 물을 흘리면 얼어 다칠 수 있으니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콜을 물에 섞으면 빙점이 낮아져 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메칠 알콜을 구입해 물에 섞어 보니 얼지 않았지요. 기왕지사 기온에 따른 배합비율을 분석해 통계자료를 만들어 두었지요.”

 

분석하고 발전시키는 것. 장교로서의 그의 기지와 기록의 습관은 청소 일에서도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서울시청앞 택시승강장을 청소하는데 새벽 1시쯤 프랑스 한국지사장이 그를 뽑은 과장과 함께 들렀다. 그리고는 영어로 질문을 던지는데 동석한 과장이 제대로 통역을 못하는 것 아닌가. 사회적 불만을 품고 기물을 파손하는 ‘밴덜리즘(vandalism)’의 경우 어떻게 조치하느냐고 물은 것. 엉뚱한 통역을 듣다 못한 그가 프랑스 지사장에게 직접 영어로 설명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 자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 지사장은 인사부장을 앉혀놓고 그의 이력서를 훑어보더니 “이 사람이 왜 이 포지션에 있는지”를 질책했다. 그는 “스스로 원해서 자원한 것”이라고 해명했고, 프랑스인 지사장은 앞으로는 청소 일을 그만하라고 지시했다. 순간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치며, ‘아, 드라마틱한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제 내 스펙에 걸맞은 지위를 되찾는구나...’ 싶었다는 강용진 대표는 “그러나 사장님은 저에게 청소반장이란 지위를 하사하셨다”면서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활짝 웃으면서 “Thank you, my boss”하고 기꺼이 수락했다고 한다.

 

 

다시 관리자가 된 그는 청소부들을 모아 “제가 하자는 데로 하실 분만 남아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청소 업무가 평생 직업이 아닌 마당에 젊고 감각 있는 친구들을 아르바이트화하는 것이 효율적이겠다 싶었다. 외주를 줄 경우 자칫 회사 이미지에 흠집을 낼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관리하는 차와 유니폼을 예쁘게 정비해 소속감을 높인 강용진 대표는 체득한 청소노하우와 도색방법 등을 일일이 교육시키면서 청소일이 즐겁고 가능성이 열리는 일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에서는 택시승강장이 관리가 참 잘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곧 JC데코 기업이미지 제고로 이어졌다. 더욱이 훗날 서울시 관계자에 의하면, 당시 이명박 시장 시절, “시청 앞 택시승강장 관리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잘 되고 있다”는 격려 전화를 관리회사에 했었고, 그로 인해 당시 JC데코 프랑스인 사장이 새벽 청소현장에 직접 나와 강 대표가 담당 청소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강용진 대표는 훗날 이 회사가 2004년 서울시 버스중앙차로 설치업체로 선정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야말로 진정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서울시 버스중앙차로 수주의 일등공신

 

버스 중앙차로는 관리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것은 서울 시민을 위한 시설인 동시에 당시 서울시의 획기적인 교통체계 개선책이기도 했다.

 

강용진 대표는 이후 본부장으로 승진해 서울시청에서 관리계획을 설명했고 당시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매우 만족스러운 점수를 얻었다. 그 당시 추운 겨울에도 시설물을 깨끗이 유지·관리하던 “시청-광화문 청소담당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소개에 그 관계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탁월한 능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는 JC데코의 본부장으로 승진해 아시아-태평양 본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회사 운영방식이 너무나 다른 한국인 사장이 내정되면서 결국 강 대표는 “이젠 내 사업을 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후진양성에 관심 많던 그는 재향군인회에도 잠시 몸담아 전직지원사업부 본부장을 맡기도 했고, 국군방송에서 취업관련 특강을 하기도 했다. 또 호주 채널10 ‘코리아 음식문화 기행’ 프로그램에 출연해 호주 유명쉐프 개리 메히건과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한국의 맛집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연평해전 이후 전직 조종사의 다채로운 인생을 조명한다는 취지에서 독일 ‘포커스’와 ‘슈피겔지’와도 인터뷰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평생 직업을 찾았다.

 

“무슨 업종에 종사할까 고민 많이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지요. 그게 바로 자동차 인테리어업이었습니다.”

 

적게 투자해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을 택한 것. 환경규제가 심해서 쉽지 않았지만 자동차는 누구나 보유하고 있고 조금만 흠집이 나도 가슴 아픈, 가장 골치 아픈 자산인 만큼 사업의 영속성 측면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강용진 대표는 2008년 자동차 토탈케어샵 ‘미르카’를 오픈했다.

 

 

 

# ROTC 전문 자동차 토탈케어샵 ‘미르카’ 대표

 

‘미르’는 용의 순우리말이자, 1986년 2월 발사된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이고, 독일어로 ‘나에게’라는 뜻의 대명사인 전천후 사명이다.

 

2008년부터 체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강용진 대표. 미르카는 자동차 2000만 시대를 맞아 차량 관련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차량 외장관리 전문업체로서 남다른 신뢰를 쌓았다. 오랜 경험을 토대로 과정관리를 중시하는 강용진 대표가 디테일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퀄리티를 따지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객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합리적인 차량관리를 할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사업이 안정될 즈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2015년 2월 사업장에 불이 나 가게 전체가 전소한 것. 강용진 대표는 전 재산을 날리면서 한 순간 주저앉았다.

 

넘실대는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동작대교 주변을 서성이기를 몇 차례. 아내와 딸을 떠올리면서 가까스로 재기의 힘을 낸 강용진 대표는 힘겨운 2년이 지난 지금, 이제 성공으로 향하는 길에 진입했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여러 힘든 일을 겪으면서 몸에 힘은 빠졌지만 주변에 적이 없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 무엇보다 그는 “고난이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런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평안함이 축복임을 몰랐을 것이란 깨달음에서다.

 

“매출이 서서히, 꾸준히 오르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지고 꽤 오랜 기간 개인의 자산으로 유지될 것입니다. 믿을 만한 수리처, 합리적 가격의 수리처를 찾으신다면 단연 ‘미르카’입니다.”

 

그는 현재 미르카의 고객 80~90%가 ROTCian이라고 소개했다.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솔직하기로 정평이 난 강용진 대표가 동문들에게 보험처리 등에 대한 세부 조언에 능숙하니 한 번 찾은 ROTCian 입장에서는 발길을 끊을 이유가 없다.

 

강용진 대표는 ROTC동문들이 믿고 의뢰할 수 있는 정비공장으로 확장 발전시키고, 기술보급 교육을 통해 토탈 자동차 매니지먼트 사업으로 키워나갈 방침이다. 향후 작은 공장을 인수해 전화 한통이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 상담하고 ‘가져가서 고치고, 다시 가져다 드리는 완벽한 서비스’를 하면서 고객들의 기회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것. 이를 통해 향후 ROTC 발전기금을 후원하는 여유를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목표 중 하나다.

 

그 때까지 환경단속이 나오든 규제가 강화되든 꿋꿋하게 버텨야 한다며 웃는 강용진 대표.

 

“요즘은 군에서 장기복무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인데 어정쩡하게 버티다 나오면 취업이 더 힘듭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 퇴직한 동문들에게 제가 직접 자동차에 대한 메커니즘과 기술을 전수하고 전국에 지사를 둬 상호윈윈하는 사업체계를 구축하는 계획도 구체화할 생각입니다.”

 

# 2016년 10월 ‘ROTC 라이더스’ 창단

 

강용진 대표와 오토바이와의 인연은 벌써 10년이 다 됐다. 제약이 많던 군대를 나와 외국계회사에서도 많은 취미생활을 경험했지만, 개인사업을 하면서는 진짜 원하는 취미를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도심에서 교통수단으로서의 편리함도 뛰어나지만, 라이딩을 즐기며 동반자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그 자유로움은 타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2015년 사업장이 전소했을 때도 그는 처분할 수 있는 것을 다 처분했지만,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만은 내놓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그 때 오토바이를 팔았으면 위험했을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할 정도로 오토바이는 강용진 대표의 삶을 지탱해준 마지막 자존심 같은 존재였다.

 

 

남자라면 한 번쯤 부러워할 만한 폼 나는 라이딩의 매력에 흠뻑 빠진 강용진 대표는 내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라이딩의 매력을 전파해 왔고 90여명에 가까운 회원 수를 자랑할 정도로 모임 규모도 상당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궁극적으로 그의 ‘미르카’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됐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 중 차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토바이만큼이나 자동차에도 관심들이 많으니 제 사업에도 플러스요인이 되었지요.”

 

그는 참여를 문의해 오는 ROTC동문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전한 모임을 만들고자 2016년 10월 ‘ROTC 라이더스’를 창단했다. 초기에 중앙대 동문들로 시작한 것에서 전체 ROTC로 저변을 확대했고 금세 회원수가 늘어 현재 33명이 가입돼 있다.

 

ROTC 라이더스는 추억을 나누는 순수하고 건전한 모임이다. 목적지를 정해 교외로 나가 바람을 쐬고 식사도 하며 각자의 오토바이 튜닝정보를 공유하고, 종종 가족들과도 어울려 화합을 도모한다.

 

# 가입조건은 뭘까.

 

“오토바이를 좋아하고 보유하고 있으면 됩니다. 기종 같은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알고 타면 안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ROTCian이라면 연락주세요, 누구나 환영합니다.”

 

# 문학과 예술 사랑하는 등단 시인이자 배우

 

자동차나 오토바이 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강용진 대표는 시인이자 배우다. 2016년 9월 ‘비 내리는 가을 밤’ ‘독도’ ‘회고’로 <지구문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시낭송대회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시를 쓰시게 된 계기를 물었다.

 

“보통 힘들 때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각자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답답함을 글로 발산했습니다. 평소 SNS에 시를 종종 올리는데, 석달 전에는 ‘가시고기’의 조창인 작가님이 제 ‘사랑’이라는 시를 읽고는 팬이라며 전화를 주시기도 했지요.”

 

‘청주에 사는 조창인’이라는 팬은 전화번호를 알아내려고 고생깨나 했다는 넋두리로 운을 띄웠다. 처음에는 유명작가인 줄 모르고 “서울 오시면 밥한 번 살게요” 했다는 강용진 대표는 설마 싶어 찾아보고는 깜짝 놀라 다시 정중히 전화를 드렸다.

 

조창인 작가는 강용진 대표의 글이 기성시인들과는 다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은유와 비유, 군더더기 없이 한글만 읽을 줄 알면 누구에게나 마음에 와 닿는 속도와 깊이가 비범한 작품들이란 것.

 

시인 일뿐 아니라 강용진 대표는 2014년 4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오페라 ‘살로메’ 무대에 배우로 서기도 했다. 이탈리아 연출가에 의해 길거리 캐스팅된 그는 한 번도 연기를 배운 적이 없지만 무대에 서는 것이 떨리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세월호사건으로 엄숙한 사회적 분위기에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삶 자체가 연기 아니냐”는 그에게 무대는 좋은 추억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기회로 남았다.

 

# “신념은 언제나 나를 똑바로 서게 한다”

 

“ROTC를 하기에 앞서 공군사관학교 시절 무스탕기에 쓰인 ‘신념의 조인’이라는 글귀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귀는 지금껏 저를 살린 원동력입니다. 신념은 신앙과도 같습니다. 넘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결코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힘입니다.”

 

그는 남의 성공사례에 심취하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맞는 신념을 갖추면 분명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강인한 신념과 함께 부인과 고3딸은 그의 삶의 기반이다. 부인은 안전을 바라는 마음에 가끔 잔소리도 늘어놓지만 그의 작품활동을 응원하는 팬이고, 딸은 고1때부터 학생회장을 도맡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십을 갖췄다. 주위 사람들을 존중하고 헤아리면서도 개성이 강해 대화할 때 고충도 있으나, 훗날 언론인을 꿈꾸는 기대주로 강용진 대표를 흐뭇하게 한다.

 

# 인생의 고비와 유혹을 끈기와 신념, 용기로 이겨낸 강용진 대표에게 ROTC는 어떤 의미일까.

 

“어느 사회나 조직이든 리드하는 그룹, 사람이 있습니다. ROTC가 우리사회에서 진정한 리더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피니언리더인 ROTC조직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ROTCian이 진짜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진정한 ROTCian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강용진 대표는 끝으로 동문들에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진솔한 안부 인사를 건넸다.

 

“고난이 축복입니다. ‘포기하지 마라, 버텨라, 이겨내라, 극복해라’는 장교출신인 우리 ROTCian이라면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어떻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고 그 해답을 얻고 못 얻는가가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떻게’를 찾아내기 위한 기본이 바로 자기 ‘신념’입니다. 말보다는 성경말씀으로 19만 ROTCian 여러분께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 남자라면 한 번쯤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강용진 대표.

 

비록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다재다능함과 긍정적 신념으로 인생을 연주하는 그는 오늘도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미르카’의 문을 연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강용진 대표의 삶과 예술, 사업을 응원한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빌립보서 4장 11절~13절

 

출처/ROTC 라이더스 회장 강용진(27기) ‘미르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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