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5-04-29 20:53:15
기사수정

▲ ⓒ 사진/윤빛나

한국 전쟁. 민족의 비극 속에 공산이냐 반공이냐로 사상 때문에 서로를 죽고 죽이던 서글픈 시절에 한 소년이 춤에 눈을 뜬다. 이럴 때가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아도 리듬과 스텝이 그를 이끈다. 꿈을 꾸라며.

포로로 보이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머리에 복면을 쓰고 춤을 추고 있다.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의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 뮤지컬 ‘로기수’이다. 창작초연으로 올해 처음 무대에 오른 <로기수>는 1952년 거제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인간 백정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까지 가진 형 로기진과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 로기수 형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당시 17만 명의 포로들을 모아놨던 거제포로수용소. 전향자와 공산주의자로 나뉘어 끊임없이 피를 부르는 투쟁이 벌어진다. 날마다 혁명 전사로서 피비린 내나는 싸움을 하고 있는 로기진은 아직 어린 동생은 자신의 뒤에 늘 숨겨둔다. 형의 영향을 받아 제국주의, 미제라면 질색을 하던 로기수는 우연히 탭댄스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수용소 책임자는 그런 로기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로기수는 진짜 춤을 출 수 있게 될까?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레 탭을 밟는 배우들의 노력으로 더욱 감동적으로 남는다. 덩그러니 놓여있던 탭댄스 군화는 극이 끝난 후 저릿한 느낌마저 준다.

춤을 춘다는 것이 그렇게도 거창한 일인가 싶지만 그 시절, 춤이니 꿈이니 다 뜬 구름 같은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포로수용소에서야.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절실했을 것이다. 소년이 바라는 꿈은 날아오를 만큼 자유로운 춤이었다.

프랜의 발동작과 리듬을 깡그리 외워 연습하는 로기수의 천진한 얼굴은 오기로 가득했다가 곧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함박웃음을 짓게 된다. 기어이 해내서만이 아니라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형이나 공산주의 동료들에게 들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춤을 추는 즐거움은 거듭되는 망설임 속에도 무럭무럭 자라난다.

자꾸만 갈등하는 로기수에게 양공주 민복심은 무대에 서고 싶은 자신의 꿈을 응원해주었던 엄마와의 추억을 얘기해준다. 매일같이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 시절에 하루를 살아도 꿈을 꾸며 살라는 말은 과하게 낭만적인 감이 있지만 어쩌면 오늘 꿈꾸지 않으면 영영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라지만 사실, 지금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치열한 전쟁 한가운데이기에.

손에 잡힐 듯 멀기만 한 꿈을 향한 발걸음은 언제나 느리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 가고 있다면 충분한 것이다. 끝까지 도달하지 못해 끝내 손에 쥐어지지 않아도 힘껏 팔을 뻗어보았다면 후회는 남지 않을 테니.

전쟁 중 상황이라는 극한 배경 속에 나와야하는 전형적인 것들이 보여 상투적인 것은 아쉽지만 배우들의 호연으로 인물들이 제각기 살아 있어 묵직한 감동이 남는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무대장치가 오히려 배우들의 풍성한 감정을 펼쳐놓을 수 있는 장이 되어 1막 마지막에 로기수의 플라잉 장면이나 2막 후반부 딴스단이 보여주는 단체 탭댄스는 압권으로 남는다.

김태형 연출과 변희석 음악감독, 원작에 김신후, 극작/작사 장우성, 작곡 신은경, 무대디자인 오필영, 조명디자인 구윤영, 안무 신선호, 탭퍼 가비 등 국내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들이 뭉친 만큼 최근 좋은 흐름을 보이고 있는 창작뮤지컬의 방점을 찍은 작품이다.

새로운 꿈, 춤추는 소년 로기수 역에 김대현, 윤나무, 유일, 각오 높게 춤추라며 결국 동생의 등을 밀어주는 형 로기진 역에 홍우진, 김종구, 춤꾼에겐 발 디딜 땅만 있으면 된다는 탭댄스 선생인 프랜 역에 임춘길, 장대웅, 로기수의 첫사랑 그녀 사랑스러운 민복심 역에 이지숙, 임강희, 극에 유머와 활력을 불어넣는 배철식 역에 오의식, 정순원, 이우종, 좀 무식하지만 로맨티스트인 이화룡 역에 김민건, 양경원, 거칠지만 매력적인 양공주 장개순 역에 김지혜, 무용은 잘하는데 방향치인 황구판 역에 김성수, 딴스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돗드 역에 권동호가 호연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꿈을 꾸는, 소년 로기수를 만나 용기를 얻고 싶다면 오는 5월 31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할용해주세요.

http://hangg.co.kr/news/view.php?idx=2424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리스트페이지_R001
최신뉴스더보기
리스트페이지_R002
리스트페이지_R003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