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1-04-20 12:05:35
기사수정

일제에 항거한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특별전시회가 4월 28일부터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지난해 10월 윤봉길 의사의 순국지인 일본 가나자와(金澤)를 방문한 박희태 의장의 윤봉길 의사 민족혼 재조명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국회차원에서 윤 의사의 상해 의거 및 일본 순국 등 생애와 활동을 재조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2012년 윤봉길 의사 항일의거 80주년 기념행사에 앞선 사전 홍보의 장 성격도 띤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결행한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여러 나라에 보도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중국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변화로 한중연합전선이 결성되는 등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19년 3 ∙ 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한 채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부업을 희망하는 농가를 지원하기 위해 월진회를 창립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하다 중국에 건너갔다.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가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연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행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대장, 일본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를 그 자리에서 절명케 했고,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군법회의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시 교외의 작업장에서 총살됐다.

형 집행 직전 “이미 죽기를 각오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젊은 나이로 이국 땅에서 순국한 윤 의사의 생애는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나라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거룩한 희생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두 아들에게 남긴 시에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봉환돼 같은 해 6월 30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이번 「윤봉길 의사 항일의거 기념 국회 특별전」은 4월 28일 오전 11시 헌정기념관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족과 월진회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 이 행사는 윤봉길 의사 항일의거 80주년인 2012년 12월 31일까지 계속 열리게 된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할용해주세요.

http://hangg.co.kr/news/view.php?idx=163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리스트페이지_R001
최신뉴스더보기
리스트페이지_R002
리스트페이지_R003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