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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8-29 16: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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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홀(토끼굴)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연극 ‘래빗 홀(연출:김제훈)’은 여러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데이비드 린지 어베어(David Lindsay Abaire)의 작품으로 2006년 토니상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2007년에는 퓰리처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아이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강아지를 따라 차도에 뛰어드는 교통사고로 4살된 아들 대니를 떠나보낸 베카와 하위 부부.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려 하지만 노력할수록, 배려할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같은 슬픔을 가졌지만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철없어 보이지만 언니의 상처를 늘 생각하는 베카의 동생 이지는 아이를 갖게 되고 10년 전 아들을 떠나보낸 베카의 엄마, 냇은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지고 베카에게 잔소리다. 모두 베카를 돕고자 하지만 마음을 쓸수록 슬픔은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대니를 치어 죽게 한 17세 소년 제이슨이 대니에게 바치고 싶다며 공상과학소설 '래빗 홀'을 써서 베카에게 보내온다.

실제로 이와 같은 고통을 겪다가 헤어지는 부부도 많다고 한다. 아이가 살았던 공간, 아이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이의 모든 물건을 싹 다 치워버리면 나을까 싶지만 어느 날 어느 구석에서 생각지도 못한 물건과 조우하게 되면 겨우 지탱하던 끈이 끊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베카는 아들 대니의 물건을 정리하고 싶고 남편인 하위는 그런 아내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슬프지만 아내의 마음을 배려해 참고 넘어가려한다. 그러나 가장 아끼던 아이의 비디오테이프에 실수로 다른 프로그램이 녹화되자 참아오던 설움이 폭발하고 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방식을 나무라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럽고 속상하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는 사라졌지만 두 사람은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의연하게 버텨내야 하고, 아내도 같이 가지 않는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모임에 나가 같은 슬픔을 가진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아이의 자리는 너무나 크고 떠난 자리는 너무나 깊다.

살아내야만 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베카는 사고를 낸 17세 소년 제이슨의 소설 ‘래빗 홀’을 읽고 그를 만난다. 어쩌면 어떤 우주에는 또 다른 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로받는다. 어쩌면 그 곳에서는 대니가 아무런 사고 없이 밝게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지금 나는 조금 슬픔 버전의 삶을 살 뿐이고 어딘가의 나는 괜찮을 거라며 눈물짓는 베카.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다. 대니가 먼저 떠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래빗 홀>은 상실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며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눈빛, 말없이 잡아주는 손길. 사람은 진실한 위로에 커다란 상실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슬픔에 빠져있다 보면 누군가의 진심도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베카의 엄마, 냇의 말처럼 ‘분명한 건 널 도와주고 싶어서’지만 당사자에게는 상처를 후벼 파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단한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살아가야만 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추하게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에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같은 슬픔에도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 이해하기 어려울 지라도 설명해달라고 떼쓰거나 이겨내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이가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일 것이다. 베카와 하위처럼.

따뜻한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깊이 있게 담아내는 ‘가을 반딧불이’의 김제훈 연출은 상실의 깊이와 무게, 긴장감까지도 세심하게 담아냈다. 애써보지만 자꾸 무너져 내리는 베카 역에 이항나, 깊은 슬픔에도 아내를 배려하는 다정한 남편 하위 역에 송영근, 말이 많아 자식들에게 타박을 받지만 그래도 의지할 엄마 냇 역에 강애심, 베카의 동생 이지 역에 전수아, 사고를 냈지만 진심으로 위로하고 용서받고 싶어 한 제이슨 역에 이기현, 김지용이 함께 한다. 오는 9월 6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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