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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03-25 11: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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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그 후 이들 대표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인들이 묻어주고 제사 지내는 풍속은 존경의 표현으로“고인돌”을 만들었든 것이 후세에까지 알려지고 있다.(영국의 “스톤핸지”도 고인돌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는 외국학자들이 많다.)전 세계 약 70% 이상의 고인돌이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삼성, 산동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보통 기원전 8000년과4000년 사이가 많다.

“말 과 문자“의 시작이 여기 이듯이 인류 문명의 시작도 이곳이 아닐까?
유럽에서는 청동기시대를 기원전3000년을 기준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민족의 역사시작 시점이 얼마나 앞서고 훌륭했든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광복 전 조선시대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 중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민족을 세뇌 시켰던 말 중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조센 진 은 명태처럼 패야 맛이 난다”, “엽전처럼 앞뒤가 다른 놈”, “아침저녁으로 생각이 다른 놈”,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반도인” 등....

이 같은 말들은 본래 우리들의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써, 우리는 친구가 월 셋방으로 이사를 해도 집들이를 하였고, 사촌이 출세하면 마치 자기가 잘된 것처럼 느끼며 집안(가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당파가 많았던 조선조 때에는 서로 조심하여 청백리가 가장 많았으며, 삼족을 멸하느니 구족을 멸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귀양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귀양 가서 동의보감(허준), 추사체(김정희), 자산어보(정약전)등 공직생활 중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귀중한 일들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많은 사화가 있었지만 정작 직접 처형당해 죽은 사람은 모두 28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는 홍익 인간정신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 이기도하다.

모함을 받은 주인집 자식을 자기 자식과 바꿔서 등에 업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살다 죽기 전에 실토하며 양 아들의 성씨를 밝혔던 사실 등은(사륙신의 한사람 박팽년 아들), 주인과 하인 관계 이상의 가족 같은 신뢰와 사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일제강점기 35년을 견디며 민족정신 이 파괴되고, 서로의 신뢰가 무너지는 불신과 살아남기 위해 남을 헐뜯는 비굴한 나쁜 습관만 남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6.25 동난 까지 겹치게 되니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려 알몸이 된 우리민족의 수난은 단군 이래 최악의 비참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지혜의 민족으로서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앞선 유럽의 몇 백 년 발전을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안에 따라잡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다이나믹하고 신바람의 민족, 아세아의 종갓집답게, 우리의 드높은 긍지, 거대한 저력으로, 다함께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이끌어 나가며, 힘차게 한민족의 웅지를 펼쳐나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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