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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03-17 12: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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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의 이름은 金春秋(김춘추)다.
그러나 신라사에 있어서의 그의 이름은, 즉위한 다음의 치적보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아, 풍전등화 같았던 신라의 社稷(사직)을 온존케 한, 그의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빛난다.
그가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 그의 준수한 용모와 뛰어난 언변은, 당나라 太宗(태종)을 심취시켰다. 그의 품격에 매혹된 태종은, 신라를 괴롭히는 고구려에 출병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13만의 대군을 바다 건너로 보내어, 백제를 응징했다.
그 덕분에 신라는 오랜 숙적인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마저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사실은 새삼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신라가 累卵(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轉機(전기)는, “삼국사기”가 밝히지 않는 김춘추의 訪日外交(방일외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김춘추가 왜국에 다녀온 사실조차 전하지 않는 “삼국사기”다. 그러니, 김춘추가 왜 왜국에 갔었는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다.
다행히 그가 찾아 갔던 왜국에는, 비록 짤막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남아 있다.

“孝德天皇(고도꾸천황)의 大化(대화) 3년 12월(서기 647년), 신라의 大阿?(대아찬) 김춘추가, 전해 9월에 신라로 보냈던 高向黑麻呂(다까무꾸노구로마로)들을 동반하고 와서, 孔雀(공작)과 鸚鵡(앵무)새 각각 한 쌍을 바치므로, 그를 인질로 잡았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담소하기를 좋아했다”

김춘추는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킨 서기 642년, 백제에 보복하기 위한 지원을 얻고자, 고구려로 간 적이 있다. 그 때, 고구려왕은 도움을 청하러 온 김춘추를, 60일이 넘도록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되자, 김유신 장군이 1만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구출에 나섰다. 김유신이 한강을 넘어 달려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고구려왕이, 그를 풀어 주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때는 구사일생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가 김춘추를 잡아 둔 것은, 신라가 몇 년 전에 竹嶺(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을 탈취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국과 신라의 관계는, 고구려와의 그것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왕이 즉위한 직후부터 왜국이 침범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라를 공격한 왜국은, 백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그들은 신라만을 그다지 괴롭혔을까?”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왜국은, 김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그들의 공격을 격화시키고, 서기 393년에는 王城(왕성)을 5일 동안 포위한 일조차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 시기의 절박했던 신라의 사정이 전혀 적혀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그 무렵의 한반도 정세와 격전상황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集安(집안)에서 好太王碑(호태왕비)가 발견된 다음부터다.

“辛卯年(서기 391년) 이래, 倭寇(왜구)가 바다를 건너 와… 신라를 격파했다”

이런 문구가 들어 있는 그 비문에는, 호태왕이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왜군을 격퇴한 사실이 적혀 있다.
實聖王(실성왕) 때가 되자, 견디다 못한 신라는 내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을 왜국으로 볼모로 보내어, 한동안 그들의 예봉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모가 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미사흔을 구하기 위하여, 왕손인 박제상이 왜로 갔다. 그는 미사흔을 빼어 내기는 했으나, 자신은 잡혀서 焚身刑(분신형)을 당하는 희생을 치렀다.
이런 끔찍한 과거사를 모를 리 없는 김춘추다.
이렇듯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줄곧 원수로 지내오는 왜국….
더구나, 육지로 이어져 있는 고구려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일본서기”가 말하듯, 만일, 왜국이 김춘추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면, 제 아무리 김유신이라 할지라도, 바다 건너에 있는 왜국으로, 구원대를 끌고 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 極惡(극악)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춘추가, 왜국으로 향했다.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는 왜국으로 갔을까? 당태종이 매혹당할 정도로 사려가 깊은 김춘추다. 그런 그가, 무작정으로 왜국에 갔을 리는 없다. 단신으로 바다를 건너 간 그의 가슴 속에, 대체 어떤 묘책이 있었을까?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우리의 의문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거기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앞에서 소개한 몇 줄 안 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서기”는 왜국 朝廷(조정)에 간 김춘추가,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담소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제 아무리 話術(화술)에 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해 주는 사람 없이는 담소할 수 없다. 즉 김춘추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응대해 준 사람이 있었음을, “일본서기”는 짐작케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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