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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03-10 1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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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내용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읽어 보노라면, 너 나 없이, 매우 이상스럽다는 느낌을 가지게 마련인 대목이, 적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創國記錄(창국기록)부터가 그렇다.
東明王(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나, 溫祚王(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하게 된 사연, 그리고 신라를 세운 朴赫居世(박혁거세)에 관한 설화 등, 그들 세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자세한 기록을 하여 두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보다 2천여 년이 앞섰을 뿐 아니라,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통일조선의 創建(창건)에 관해서는, 오직 중국사에서 인용한 記事(기사)가 몇 줄 있을 뿐이니, 이 어찌 怪異(괴이)하다 않겠는가?
그 탓으로, 우리의 건국사는, 애매모호한 소위 단군신화 속에 파묻혀 있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檀紀(단기) 4334년 대신, 우리민족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西紀(서기) 2001년을 맞이하게 돼 버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의 檀君史(단군사)를 소홀히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의 大罪(대죄)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어찌 보면 단군사의 누락보다도 더 엄청난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文武王(문무왕) 2년(서기 662년) 2월조를 보면, '本彼宮(본피궁)의 財貨(재화)-田莊(전장)-奴僕(노복)을 中分(중분)하여, 그 반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줬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본피궁이란,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昔氏王家(석씨왕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석씨왕가의 모든 재화와 노복들마저 모조리 나라가 몰수하여, 그 절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이 느닷없이 삽입된 기사는, 실로 알지 못할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기 662년이라면, 數百年(수백년) 동안 혈투를 계속하여 오던 숙적 백제를,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끝끝내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 경사스러운 때다. 그런 국가적으로 기쁜 때에는 으레,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상식일 텐데, 오히려 전례가 없는, 석씨왕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단행됐다니 어찌된 일인가?
왜 하필, 이 더 없이 기뻐해야 할 때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신라 三王家(삼왕가)의 하나인 昔氏王室(석씨왕실)에 대하여, 문무왕은, 그토록 무자비하고도 가차없는 철퇴를 내렸을까?
문무왕은, 석씨왕실에 대한, 서릿발 같은 날벼락 처단을 집행한 다음 달인 3월이 되어서야, 죄인들에 대한 전국적인 사면을 선포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석씨왕실의 재산을 몰수한 사실만을 기록해 놓았지만, 사실은 이 때, 석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석씨는, 전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도, 8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1985년 통계) 稀姓(희성)으로 전락돼 있다.
신라의 3왕실 가운데서, 김씨와 박씨는, 그 자손이 각각 880만명과 350만명에 가까운 방대한 수를 헤아리는 大姓(대성)으로 자라난 사실에 비춰 볼 때, 석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혹한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한 사람 또는 몇몇을 처형한 것이라면 모르되, 석씨 전체에 대하여, 지금 생각하여도 끔찍하고도 소름이 끼치도록 처참한 처분이 취해졌다면, 거기에 대하여, 그 당시의 온 나라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왜 석씨왕실뿐 아니라, 모든 석씨에 대하여, 그토록 혹독한 처벌을 내렸는가에 관하여, 편찬자는 단 한 마디 설명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더욱 주목해야 할 일은, 김내물왕(金奈勿王)이 왕위에 오른 서기 356년부터, 고려가 건국된 때까지, 거의 600년 동안의 우리나라 역사에는, 석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문중에서, 侍郞(시랑) 昔載興(석재흥), 兵部令(병부령) 昔時宗(석시종), 左僕射(좌복사) 昔運尼(석운니), 密直司(밀직사) 昔漢一(석한일) 등이 연달아 등장하게 되는 것은, 고려조에 들어선 다음, 文宗(문종) 때가 지나서부터이다.
더구나, 석씨족보에는, 昔脫解(석탈해)의 23世孫(세손)이라고 하는 석재흥이, 始祖一世(시조일세)라고 되어 있을 뿐, 석씨왕실의 마지막 임금인 訖解王(흘해왕)의 손자 恬(념)과 姓(성) 이후, 석재흥에 이르는 계보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석씨족보의 공란 뒤에는, 석씨 조상들이, 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겪었으면서도, 문자로는 한 마디도 자손에게 남기지 못한, 기막히도록 서러운 사연이 적혀 있을 것이며, 후세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애절한 호소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가 밝히지 않았던 석씨들이 겪은 참변의 실상을, 일본 古代史(고대사)와 옛 문헌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열쇠로 삼아 파헤쳐 밝혀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600년에 걸친 놀라운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독자는, 이 글을 읽어감에 따라, 오늘날 일본이라고 불리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보면, 바로 우리와 핏줄로 이어져 있는 겨레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두 나라 사람들이, 신라가 건국한 때부터 시작하여,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650여년 동안, 왜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21세기로 발을 내디디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전후 약 6년(서기 1592~1597년) 계속됐던 임진왜란이나, 36년 동안의 일본식민통치를 운운하기보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기막힌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 직시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우리 고대사의 참 모습을 되찾는 슬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 이상 지난 오늘까지도,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속 이 구석 저 구석에는, 아직도 서먹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일 정치인들의 안목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나도록, 일본고대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게을리하고 있는 우리 사학자들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두 나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끈질긴 더덕때를 말끔히 씻어 없애는 세척제가 되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여러분 앞에 보내려 한다.
21세기를 맞이한 인류는, 지금 우주식민지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섰다.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고 생각한 ‘아이작 뉴턴’의 "왜?" 하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뉴턴’의 "왜?"는, 대우주의 만유인력법칙을 발견케 하여, 인류의 꿈을 무한한 우주공간 속으로 뻗어 나가게 했다.
그리고 이 글에 담겨져 있는 숱한 "왜?"는, 망각의 時海(시해) 속에 파묻혀졌던,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되찾게 해 줄 것이다.

가라민족문화연구원(韓民族文化硏究院) 학술고문 故 박 병 식
자료제공 한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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